최중호 수필

은행잎 편지

여강 선생 2023. 9. 30. 15:04

                                                                         은행잎 편지
                                                                                                   최중호
  편지함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어디서 올 편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기다려지는 것은 지난날의 추억 때문일까.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꿈과 낭만이 함께하던 수학여행은 가을에 있었는데 그 코스는 남해안으로 정해졌다.
  친구들 몇이 모였다. 숙박하는 장소에 있는 여학생들과 편지로 미리 사귄 후, 여행 때 만나자는 것이다. 우리의 편지 상대는 통영에 있는 여학생이었다.
  우선 편지를 써야 할 텐데, 처음 써보는 분홍빛 사연이라 잘 써지지 않았다. 애꿎은 편지지만 여러 장 버렸을 뿐이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나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대중가요에는 귀에 익숙했으나, 시나 소설에는 눈이 어두웠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국어 실력을 다 동원했는데도, 편지는 채 한 장도 되지 않았다. 읽어보면 할 말은 다 했는데 문장력이 마음을 따르지 못해 너무 짧았다. 이것을 그대로 보냈다가는 여학생에게 호감은커녕 답장을 받을지 의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편지를 잘 쓰는 친구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친구의 글솜씨는 마음에 들었다. 그의 멋진 문장이 하룻밤 사이에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내가 주인이 된 것이다.
  누구에게 보낼까. 편지를 받아 볼 여학생의 이름은 물론 주소도 모르는 처지였다. 궁리 끝에 나와 학년 반 번호가 같은 여학생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하지만 답장이 올 확률은 아주 낮았다. 그때만 해도 남녀가 사귀는 것이 공공연하지 못해, 남학생한테 편지가 오면 그 여학생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날, 집배원이 편지 한 통을 전해 주었다. 내게로 온 편지다. 처음 받아 본 편지라 무척 반가웠다. 나는 좋아서 읽고 또 읽었다.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서 읽었다.
  답장을 써야 했다. 이번엔 친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써 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낯모르는 여학생의 모습은 아름답게 그릴 수 있었으나, 써야 할 말이 영 생각나지 않아 고민만 하였다. 편지는 역시 짧았다. 나같이 둔한 머리로 좋은 문장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척박한 땅에 큰 나무를 키우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집 뒤란에 묘목 한 그루를 심은 적이 있다. 은행나무다. 그 나무는 몇 년이 지나도록 별 변화가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다른 나무에 비해 잎이 작았고, 가을이 되기 전에 잎이 누렇게 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은행나무는 비옥한 땅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나무가 잘 자라지 않고 잎이 작았던 것은, 척박한 토양 때문이었다. 나무는 영양실조였다.
  은행나무를 생각해 본다. 그 나무는 마음의 양식이 될 책을 읽지 않아, 편지를 쓸 때마다 적절한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내 모습과 같았다.
  짧은 내용의 편지였으나 편지를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리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녀를 그리워했나 보다.
  그녀와 몇 차례의 편지가 오가는 동안 기다리던 가을이 왔다. 그러나 나는 여행을 가지 못했다. 홀로 계신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그때까지 여행이란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친구들이 여행을 떠나던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밭에 나가 땅콩을 캐야 했다. 몸은 비록 여행을 떠나지 못했지만, 마음은 벌써 친구들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생각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것이다. 상상이란 실현보다 실현 가능성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자연경관도 실제로 보는 것보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는 게 낫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상상하는 것이다.
  내 상상의 나래는 가을 하늘 높이 날아 통영으로 갔다. 편지를 나눈 여학생과 처음 만난다 생각하니, 가슴은 뛰고 얼굴은 붉어졌다. 맨 처음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손끝이 쓰렸다. 호미가 아름다운 꿈을 시기라도 하듯 상상의 나래 깃을 찢어 버린 것이다.
  손가락에 난 상처를 보는 순간 내 처지가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통영에 간 친구들이 더없이 부러웠다.
  며칠 후, 여행을 떠났던 친구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여학생들을 만났다고 했다. 만남이 얼마나 즐거웠든지 피로한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편지를 나누던 여학생도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올 것이라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왔다가 침울한 표정만 남기고 돌아갔다 하였
다.
  그녀로부터 편지가 왔다. 사연 없는 편지 속에서 노란 은행잎 하나가 나왔다. 무슨 의미일까? 그 뒤로 그녀의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그 후, 우리 집은 읍내로 이사를 했고, 나는 고향 집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어려서 심었던 은행나무가 그리워진다.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몰라보게 자랐을 것이다. 뿌리도 깊이 뻗었을까. 그렇다면 가을엔 크고 노란 은행잎을 달고 있으리라. 그러나 한 그루만 심었기 때문에 분명 이성(異性)을 그리워할 것이다.
  은행나무는 마주 보아야 그 의미가 있다. 은행나무는 떨어져 있어도 바람에 의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던데….
  오늘도 내 시선이 편지함에 머무는 까닭은 노란 은행잎 때문일까. 

                                                                   (1992.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수필선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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