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저금통 속의 유행가

여강 선생 2024. 4. 3. 21:07

                                                            저금통 속의 유행가
                                                             
                                                                                                 최중호                     
  내 책상 위엔 우체통 모양으로 된 저금통 하나가 있다. 외출하고 돌아와 쓰고 남은 잔돈을 그 저금통에 넣는다.
  오래전 일이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에서 단체 영화 관람이 있었다. 학생들은 지루한 수업보다 몇 배나 즐거운 일이지만, 교사는 학생들을 인솔해 극장에 가면 혼탁한 공기 속에서 두 시간 이상을 견디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영화가 끝나고 몇 선생님들과 함께 술집으로 갔다. 술을 마시기 위해 일부러 시내에 나올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였다.
  술상 위에 안주가 나오고 사람 수에 맞춰 잔이 놓였다. 서로 마주한 상대방에게 술을 한 잔씩 권하고 마셨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빈병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얼굴엔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 잔 술로 목이나 축이자 한 것이 이젠 목 언저리까지 붉어졌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기엔 이른 모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흥은 더해져 콧노래가 나오고 어깨도 들썩거렸다. 
  평소엔 말이 없고 얌전했던 친구도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큰 소리로 말도 잘한다. 
  옆방에서 유행가 소리가 들린다. 그쪽 방 사람들도 벌써 취기가 오른 모양이다. 술상을 두드리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유행가를 부른다. 유행가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나이를 대충 짐작할 수가 있다. 대부분 유행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이나 사람들의 심정을 노래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 유행가를 대중가요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를 노래에 타서 술로 마신다. 그러기에 자신이 처한 심정이나 환경을 표현한 노래가 나오면 절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도 모르게 노래에 취해 따라 부르기도 한다.
  옆방에서 「한 많은 대동강」이란 노래가 들린다. 이 노래를 들으니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다. 삼촌이 동네 친구들과 함께 부여 읍내로 야유회를 간다고 했다. 나도 삼촌을 따라가겠다고 졸랐다. 삼촌은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꺼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나를 데리고 가면 신경이 많이 쓰일뿐더러, 친구들과 마음 놓고 놀기도 거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몰랐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뿐이라 삼촌이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며 졸라댔다. 그때만 해도 내 고집이 여간 센 것이 아니었다. 내 주장이나 요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떼를 쓰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삼촌은 나를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우리 집에서 부여까지는 강을 건너 5km 거리였다. 토끼들이 발을 맞추는 시골이라 차도 다니지 않아 걸어서 갔다. 시골 촌놈이 읍내를 간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장날이면 어른들도 별 볼 일이 없어도 보리나 쌀 한두 말을 등에 지고 장에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삼촌 친구들은 발걸음이 빨랐다. 어린 내가 따라가기엔 힘이 너무 부쳤다. 그래 뛰어가기도 하고 뒤처져 걷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부여까지는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따라갔다. 읍내에 도착했다. 촌놈이라 그런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좋게 보였다. 거리에 있는 상점 진열장의 모든 물건이 처음 보는 것이라 갖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중 나의 눈길을 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우체통 모양으로 된 저금통이다. 윗부분은 빨간색이고 중간 아랫부분은 짙은 하늘색으로 된 저금통. 열쇠를 배꼽 부분의 홈에 넣고 돌려야 문을 열 수 있는 예쁜 저금통이었다. 
  내가 저금통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삼촌 친구들은 이미 상가를 지나 부소산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 때문에 삼촌은 친구들로부터 뒤에 처진 채 내 팔을 잡아끌며 빨리 가자고 재촉하였다. 나는 삼촌을 조르기 시작했다. 고집불통인 내 성격을 잘 아는 삼촌은 친구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얼른 저금통을 사주었다. 나는 갖고 싶은 물건을 가졌다는 마음에 하늘을 날 듯 기뻤다.
  삼촌 친구들은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 길목에 있는 사비루란 정자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술기운이 얼큰해지자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흥겨운 노랫소리는 소나무 가지 사이를 잠시 맴돌다가 이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때 삼촌 친구들이 함께 불렀던 노래가 ‘한 많은 대동강’이란 노래였다.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인지, 어떻게 부르는지도 몰랐던 노래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삼촌도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셨고, 나도 고향을 떠난 지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저금통을 갖고 있으며, 그 노래도 기억하고 있다.            
  삼촌 생각이 난다. 저금통 속에서 유행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렸을 적 삼촌 친구들이 불렀던 ‘한 많은 대동강’이란 노래다. 그 노래가 듣고 싶다. 저금통을 열어,「한 많은 대동강」이란 노래 CD를 한 장 사 가지고 왔다.

                                                                                                 (2021. 수필과비평.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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