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령에서 흘린 눈물
최중호
같은 길도 즐거운 길이 있고 슬픈 길이 있다.
스승의 날을 맞아 ㅊ공고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선생님들을 초대했다. 고속도로를 이용해 천안으로 갔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가슴에선 젊음이 터질 듯했던 그들이 이제 사십 대 중반이 되어 나타났다. 그들의 모습도 많이 변해 학창시절의 외모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얼굴 한구석엔 아직도 옛날의 모습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운동장에서 사제(師弟) 간 배구시합을 한 후, 식사를 하면서 학창시절의 실수담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지나간 세월 동안 고이 접어두었던 추억 속엔 즐거움과 슬픔이 아련히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제자들과의 즐거움을 뒤로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아쉽게 헤어졌다.
천안에서 대전으로 돌아올 때는 일부러 국도를 택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차령산맥의 넉넉한 품에 한 번 안겨보고 싶어서였다.
국도를 따라 차령 쪽으로 오는 길은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똑같은 길이지만, 지난날 서울에서 학원에 다니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차령 길과는 느낌이 서로 달랐다.
그때는 비포장 길이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버스가 하얀 흙먼지를 꼬리에 달고 달렸다. 버스도 차령마루를 오를 때에는 힘이 겨워 바동거리며 꽁무니에선 검은 연기를 내뿜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나는 야속했던 큰아버지만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때마침 차령 위에 떠 있던 먹구름이 비가 되어 내렸다. 차창 위에 흐르던 빗물이 답답한 가슴을 적시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물이 되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지금까지 맺혔던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오른 것이다.
아버지가 없는 설움을 이토록 뼈저리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친구들은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건만, 나는 왜 이렇게 서러운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차령마루에서 흘렸던 눈물은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 자국은 아직도 남아 지워지질 않는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의 일이다. 학교에 다닐 때는 초등학교의 교사로 있던 누나와 함께 읍내에서 생활했지만,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나선 시골집에 가서 재수를 하였다. 읍내에 있을 때는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외로움을 몰랐으나, 혼자 떨어져 적막한 시골집 골방에 틀어박혀 있자니, 이곳이 바로 감옥이었다. 독방에 갇힌 죄수가 외로움을 참지 못해 탈옥할 계획을 세우듯, ‘언제 이 감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까?’ 하는 생각으로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외로움을 참는 것도 하루나 이틀이지, 날이 갈수록 답답하고 적막하기만 하였다. 이럴 때 서울로 간 친구들의 소식이라도 들을라치면 마음은 더 심란했다.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해 저녁이면 동네 뒷산에 올라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침묵하다가 굽이굽이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며 답답한 심정을 강물에 띄워 보내기도 하였다.
‘서울에 가서 학원을 다니면 공부도 더 잘될 텐데.’ 하고 생각하면,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서울 갈 궁리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서울에 가서 학원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한동안 망설이다 어머니께, “서울로 보내 달라.” 사정을 해봤지만, 대답이 없으셨다.
서울에는 부유하게 사시는 큰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선 ‘큰댁에 가 몇 달만 신세를 지면 될 것도 같은데’,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서른여섯에 남편을 여의고 농사일로 손가락에 지문조차 없어질 정도로 일을 많이 하셨던 어머니. 하지만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어머니였지만, 서울 가는 것은 마다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에 큰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조카도 어떻게 보면 자식과 같은데….’ 하고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편지를 보내고 한 달이 지났는데도 서울에선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쳐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짐을 꾸려 서울행 버스를 탔다.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서울. 하지만 그러한 꿈도 잠깐이었다. 큰아버지 내외분께 인사를 드렸으나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 무더운 날씨에 아무 말씀도 없으신 두 분 앞에 묵묵히 앉아 있기도 민망해서 친구를 찾아 나섰다.
전화번호 하나 없이 달랑 주소만 갖고 나선 서울 길은, 번거롭고 복잡하기만 했다. 땀을 흘리며 한나절을 헤맨 끝에 저녁 무렵에서야 서울에 와 있던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를 만나 답답하고 서운했던 일들을 모두 잊고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하지만, 오늘이 문제였다. ‘큰집에서 큰아버지 내외분의 눈치를 봐가며 학원에 다녀야 할 것인지, 아니면 답답한 시골로 다시 내려가야 할 것인가?’ 고민한 끝에 눈치를 보면서 구차하게 서울에 머물기보다는 마음 편한 시골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큰댁으로 가 큰아버지 내외분께 인사를 드린 후, 풀지도 못한 큰 가방을 들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서운한 마음이 앞서 막상 서울을 떠났지만 돌아오는 길은 마냥 괴롭기만 하였다. 버스 안에서도 줄곧 많은 생각을 하였다. 세상일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과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지금까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수아비와 같은 생활을 끝내고 두문불출한 후,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였다.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보니 학창 시절에는 잘 이해를 할 수 없었던 내용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그동안 힘이 들 때는 큰아버지를 원망도 해보았다. 그 원망 속엔 아버지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한다는 자격지심도 섞여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서울에서 받았던 충격은 너무나 컸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갔을 때도, 큰집에 고기를 사 들고 인사를 하러 갔지만, 식사를 하고 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아픈 상처도 쉽게 아물게 하는 묘약이 들어있었는가 보다. 서러웠던 마음도 조금씩 풀려 큰집에서 식사도 하고, 하룻밤을 지내기도 하였다.
한때는 모든 것이 야속하고 서운했던 일이지만, 만약 큰집에서 학원에 다녔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놀기를 좋아하는 내 성격으로 봐서 공부는 게을리했을 것이고, 다시 대학 진학에 실패해 더 큰 고생을 했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큰아버지 내외분의 차가운 표정이 나에게 현실 감각을 빨리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차령마루에 올라 휴게소에서 차 한 잔을 마신 후, 즐거운 마음으로 차령을 넘는다.
(2003. 에세이문학.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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