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 듯 말 듯
최중호
통영,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하계 수필문학 세미나가 통영에서 있어 동료 문우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 가면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세미나가 끝나고 저녁에 도남관광단지 해변의 음악 분수대가 있는 휴게광장으로 갔다.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곳으로 모였다. 광장 옆 해변엔 여러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곳에서 각 지역에서 온 문우들과 함께 생맥주를 마신 후, 전 통영시장인 ㄱ님의 안내를 받아 해변을 돌아본다. 해변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홀로 쓸쓸하게 벤치에 앉아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여고 이 학년쯤으로 되어 보인다. 쓸쓸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사십 년 전, 나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나왔다가 쓸쓸한 뒷모습만 남기고 돌아갔을 한 여고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춘기에 접어든 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다. 우리들의 가을 수학여행은 통영으로 갈 예정이었다. 친구 중 한 명이 통영에 사는 여고생들과 편지를 나눈 후, 수학여행 때 만날 것을 제안해 왔다. 모두가 찬성했다. 하지만 주소와 이름도 모르는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우리는 통영에 있는 한 여자고등학교를 택한 후, 학년과 반, 번호가 같은 여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처음부터 답장이 올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남학생한테서 여학생에게 편지가 와도 담임 선생님이 그 여학생에게 편지를 전달해 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편지를 보낸 것조차 잊고 지내던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편지 봉투에 적혀있는 여학생의 이름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받아 본 여학생의 편지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진정하고 천천히 편지를 읽어 보았다. 자신의 소개와 함께 마도로스인 아버지가 엄해서 집으로 편지하지 말고, 친구의 집인 미수 2동 ○○번지로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편지가 몇 차례 오가면서 정이 들었고, 그러는 사이 수학여행 날짜가 다가왔다. 같이 편지를 보냈던 친구들도 여학생들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 모두 들뜬 기분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께 수학여행을 간다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다. 홀로 계신 어머니께 차마 수학여행을 보내 달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밭에 가서 땅콩을 캤다. 마음은 이미 친구들과 함께 통영에 가 있었다. 친구들이 여학생들을 만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며칠 후, 친구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왔다. 교실은 온통 통영에서 여학생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이야기 끝에 나와 편지를 나눴던 ㅂ양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약속한 장소에 나왔다가 실망을 하고 혼자 쓸쓸히 돌아갔다고 한다.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
수필을 쓰면서 내가 쓴 글을 오십 대 후반이 되었을 그녀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마침 수필문학 세미나에서 통영에 사는 한 문우를 만났다. 그녀와 동년배로 보이는 문우에게 그녀의 주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의 출신학교로 찾아가 학창시절의 주소를 확인한 후, 동사무소 직원 및 경찰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서울로 출가해 사는 그녀의 주소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무척 반가웠다. 그녀로부터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와는 좀 달랐지만 그래도 마음은 설렜다.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몇 편의 수필과 수학여행 때 실망하게 해서 미안했다는 말도 함께 전하고 싶었다.
그 후 소식을 기다렸지만, 통영에 사는 문우한테선 소식이 없었다. 이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사라져 갈 무렵, 수필문학 세미나에서 통영의 문우를 다시 만났다. 항상 명랑하고 쾌활했던 문우였지만 그 날은 표정이 밝지 않았다. 고대했던 그녀의 소식도 전해주지 않았다.
문우를 불렀다. 그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녀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통영의 문우가 서울로 전화를 했다. 딸인 듯한 아이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와 통화할 수 있느냐?”라는 말에 딸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왜 어머니를 찾느냐?”고 말했다. 어머니와는 고향 친구라 하니, 흐느껴 울면서 더는 말을 잇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과 함께 흐느껴 우는 딸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하였다.
그는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내게 차마 슬픈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소식을 묻지 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간직했어야 했는데….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그녀.
오늘 통영에 와서 그녀가 생각날 줄은 미처 몰랐다. 어디선가 웃으면서 반갑게 나타날 것만 같았다.
광장의 분수대에선 물줄기가 힘차게 솟아올랐다가 다시 사그라진다. 하늘을 보며 그녀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하늘엔 회색 구름에 가린 반달이 희미하게 떠 있다. 그녀가 구름 뒤편에 숨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어두운 달을 보니 우울한 마음이 쉬 가시질 않는다.
이튿날 아침, 숙소인 청소년수련관에서 동요가 흘러나왔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오기」란 노래다. 그 노래가 내 마음을 더 슬프게 한다.
그녀가 이미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일까, ‘보일 듯, 보일 듯’한 그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질 않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에 올랐다. 정상으로 가 그녀가 살았던 미수 2동을 바라보았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데….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쉬움으로 남아, 그녀가 살았던 동네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꿈 많던 그녀가 여고 시절 다녔으리라 생각되는 길. 그 길을 걸으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일 것 같다.
(2008. 수필문학.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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