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주름 속에 묻힌 세월

여강 선생 2024. 10. 14. 19:44

                                                                       주름 속에 묻힌 세월

                                                                                                최중호
                         
  어머니. 
  어머니 가슴은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저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마음의 안식처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제가 네 살 때 아버님은 저의 곁을 떠났지요. 그 때문에 아버지란 말은 생소했지만 어머니란 말은 언제나 제 곁에 친근하게 다가왔지요.
  어머니, 당신은 저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셨고, 지금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오늘도 자식들만을 생각하고 계신다는 걸 저는 압니다. 여든일곱의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새벽마다 장독대에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자식들이 잘되기를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빌고 계십니다. 
  어머니, 저는 어릴 적 희미한 기억 속에서나마 아버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왼손을 잡아줄 어머니는 계셨지만, 오른손을 잡아 줄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늘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 팔에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고도 싶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바쁜 일손에 쫓겨 한가하게 아들의 손을 잡고 다닐 여유가 없으셨지요. 그런 까닭에 어린 저의 손에도 부드럽고 따뜻한 어머니의 손목 대신 딱딱하고 차가운 호미가 쥐어졌고, 호미를 든 저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밭으로 나가야만 했지요.
  지금은 제초제가 농촌의 일손을 많이 덜어주고 있지만, 그때는 일꾼들의 손에 든 호미만이 잡초를 제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지요. 
  햇볕이 장렬하게 내리쪼이는 여름날이 저는 싫었습니다.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밭을 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밭을 매면서 훌륭한 성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저에겐 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한 고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성큼성큼 저만큼 앞서가셨지만, 저는 느린 걸음으로 힘들게 뒤따라갔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밭을 매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날의 여름 해는 왜 그리 길었고, 밭이랑은 왜 그렇게 길었던지요. 한 번 왔다 가는 데도 한나절이 더 걸렸지요. 해가 빨리 서산으로 기울면 집에 돌아갈 수 있으련만, 뜨거운 태양은 제자리걸음만 할 뿐, 서산으로 기울지 않아 어린 가슴을 더 태웠지요.
  밭 언덕에 있는 나무 그림자가 길어질 때면,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흐르던 땀을 멎게 해주는 저녁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어둠이 신작로에 깔릴 무렵에야 아픈 허리를 두들기며 일어설 수가 있었지요.
  어머니.
  어린 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보냈던 하루보다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소음 속에서 지내는 하루가 더 짧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어린 시절 그런 어려움 속에서 저는 인내를 배웠고, 힘든 일에 부딪히더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는 끈기를 익혔습니다.            
  어머니, 세월은 생활방식을 바꾸고 마음 또한 변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어머니도 손에 드셨던 호미를 놓으셨고, 저 또한 호미를 놓고 생활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땀 흘려 매시던 밭이랑 대신, 아름답던 어머니의 이마엔 주름만 가득하군요. 그 주름 속에는 흐르는 세월 속에 묻혀 버린 근심이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군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주름 속에 자란 근심이란 잡초를 뽑기 위해 오늘부터 놓았던 호미를 다시 잡으렵니다.
  어머니, 이젠 얼굴을 활짝 펴시고 여생일랑 번뇌 없는 얼굴로 가꾸어 가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
 
                                                  (2004. 한국수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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