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솔가지를 든 소방대원

여강 선생 2025. 3. 1. 20:42

                                                                     솔가지를 든 소방대원

                                                                                            최중호
   봄바람이 분다. 하지만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기에는 좀 이른 느낌이 든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 오후에 차를 몰고 나갔다. 가을엔 곡식들로 들판이 풍성했는데 지금은 한가롭다. 너른 들판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해충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지른 것이다. 불길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작은 몸으로 세찬 바람을 안고 걷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걸음조차 떼기 어려웠다.
  그날도 거센 바람을 막아주던 저수지 언덕은 우리가 쉬어 가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거기서 뒹굴며 재미있게 노는 동안 따뜻하게 비춰만 주던 햇볕도 열기를 잃고 서산으로 기울어갔다. 햇볕이 가시자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이때 한 아이가 찢어진 성냥갑과 몇 개의 성냥개비를 꺼내자 모두의 관심은 그 아이에게로 쏠렸다. 그 애가 성냥으로 불을 켜려 하자, 우리는 그의 주위에 삥 둘러앉아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성냥불을 켜는 데 익숙하지 못했던 그 애는 성냥을 여러 번 켜 봤지만, 성냥불은 켜지지 않았다. 힘주어 켜 봐도 성냥개비만 부러질 뿐 불은 켜지지 않았다. 잔디 위로 부러져 나간 성냥개비를 주워 다시 켜봤지만, 이번엔 성냥개비에 묻어있던 유황마저 떨어져 나갔다.
  그 시절 어른들은 아이들이 성냥갑을 가지고 다니면 불을 낼까 봐서 갖고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호기심 많던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성냥갑에서 인(燐)이 칠해져 있는 긋는 부분을 조금 찢어 낸 후, 성냥개비만 몇 개 가지고 다녔다. 
  성냥불이 켜지지 않자 모두가 실망하고 있을 때, 좀 떨어진 곳에 있던 ㄱ이 “이리 와서 불을 쬐라.”며 소리를 지른다. 추위에 떨고 있던 우리에겐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모두가 “야아-”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처음엔 서로 바짝 붙어 불을 쬐며 몸을 녹이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한바탕 지나가자 불길은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불길이 번질수록 우리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았다. 불길이 번질 때마다 옮겨 앉다 보니 이젠 서로의 간격도 점점 멀어져갔다.  불길은 바람의 속도에 따라 잔디를 빠르게 태워나갔다. 불길이 꽤 넓게 번지자 우리는 겁이 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신발을 벗어 불을 끄기 시작하였다. 신발로 불을 끄는 속도는 빠르게 번져가는 불길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모두 불 끄는 동작을 멈추고 근처에 있는 산으로 달려갔다. 산으로 가면서도 빠르게 번져가는 불길은 우리의 마음마저 태우고 있었다. 산에서 소나무 가지를 닥치는 대로 꺾어 가지고 달려와 불을 끄기 시작하였다. 신발로 끌 때보다는 나았지만 넓게 번지는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불길이 번지는 곳으로 따라가 불을 끄다 보면 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되살아나 다시 타고 있었다. 달려가 불을 꺼봤지만, 불길은 우리를 조롱이나 하듯 멀리 달아나 버렸다. 얼마나 두들겨 불을 껐던지 이젠 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소나무 가지에 달려 있던 솔잎도 다 떨어져 나가서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솔가지를 든 소방대원들은 멍청히 서서 불길이 번져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수지에 물은 가득했으나 불을 끄는 데는 아무 소용없었다. 이젠 등에 둘러메고 있던 책보로 불을 끄기 시작하였다. 책보 속에 책이 싸여져 있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두들겨 꺼 봐도 소용이 없었다. 
  저수지 언덕의 절반 이상이 검게 타버렸다. 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뿐, 이제는 불을 낸 것에 대한 책임을 서로 회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맨 처음 잔디에 불을 붙였던 ㄱ은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겁을 먹어 얼굴이 창백해졌고 눈에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불을 낸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의 애처로운 눈물이 측은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모두 애태우며 불길이 번져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 불을 끄는 데 필요한 어떤 묘책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젠 빠른 속도로 번져가는 불길을 바라볼 용기조차 없었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하나둘 집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ㄱ만은 그곳에 남아 불길이 번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도 체념했는지 멀찌감치 떨어져 우리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갈지라도 우선 그곳에서 벗어나고 보자는 생각뿐이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불길도 잔디를 다 태우고 더 태울 곳이 없어 저절로 꺼졌을 것이다. 
  이튿날 등교하면서 우리는 저수지 화재의 방화 공범임을 숨기고, ‘잔디가 어디까지 탔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저수지 언덕을 살피며 걸어갔다. 
  차창 밖에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는 어린 시절 솔가지를 든 소방대원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직도 산등성이에는 하얀 눈이 남아있다. ‘차가운 눈은 매화 속에 사라지고, 봄바람이 버들가지 위로 돌아온다.’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어느새 봄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2017. 수필문학.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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