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시작이요, 기다림이다
최중호
봄은 시작이다.
하루 일과는 아침에 시작된다. 아침 해가 붉은 옷을 입고 산마루에 오르면, 종달새 나래를 쳐 하늘에 닿고, 개미들이 숲길을 기어갈 때 하루가 시작된다.
초승달은 한 달의 시작이다. 초승달이 살짝 얼굴을 내밀면 한 달이 시작되고, 휘영청 밝은 달은 그달의 절정이며, 어두운 그믐달에서 한 달은 끝이 난다.
네 계절의 시작은 봄이다. 봄은 만물이 기지개를 켜며 소생을 알리는 계절이다. 농촌의 봄은 밭갈이에서 시작이 된다. 밭갈이하는 농부의 양어깨에도 따뜻한 봄볕이 살포시 내려와 앉는다. 밭갈이를 끝내고 씨를 뿌린 농부는, 씨앗이 싹 틔우는 것을 보고 한 해의 농사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어렸을 적 누나를 따라 봄을 맞으러 들로 나갔다. 나물을 캐기 위해서다. 하늘에선 종달새 노래가 봄을 알렸고, 땅에선 들판 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봄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쑥이나 민들레는 뿌리의 윗부분을 잘라 뜯었지만, 냉이와 달래는 땅속 깊이 칼을 넣어 뿌리째 캤다. 그중 상큼한 달래의 향은 콧속으로 몰래 숨어들어, 봄 내음을 가슴 그득히 채워 줬다.
봄은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도 왔다. 가까이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파란빛이 돋아나 있다. 다른 나무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데, 수양버들은 벌써 잠에서 깨어나 봄을 맞이하고 있다. 새싹 돋은 수양버들이 실바람에 흔들리고, 아이들이 호드기 불며 고샅길을 뛰어다니면, 나물 캐는 소녀들의 치마폭에도 봄은 숨어서 왔다.
스치는 찬바람에 할미꽃이 수줍어 고개를 숙이면, 추위를 피해 땅바닥에 달라붙은 민들레는 맑은 향기와 고결한 자태로 봄을 알려 왔다.
봄이 오면 응달진 시냇가 얼음장 밑에도 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초가집 처마를 못 잊어서 다시 돌아온 제비의 날개깃에도, 따뜻한 봄은 실려 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유치원을 졸업한 철이가 엄마와 함께 종종걸음으로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는 것도 봄이다.
봄은 기다림이다.
망부석은 기다림의 화신(化身)이라 하겠다.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어 버린 치술령의 망부석(望夫石). 치술령에서 왜국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박제상의 아내. 봄이 되면 그 망부석의 틈새에도 진달래꽃이 핀다. 목을 길게 뺀 진달래꽃은 동해를 바라보며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봄은 메마른 가지에서 꽃 피우길 기다리는 계절이다. 살구와 복숭아가 화사한 꽃과 향기로 마음을 설레게 하면,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도 봄이다.
지난가을 취직을 해서 돌아오겠다며 서울로 간 삼돌이. 순이가 문설주에 기대선 채 발꿈치 들고, 삼돌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도 봄이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로 세상이 어수선해졌다. 사람들은 감염 예방을 위하여 마스크를 쓰고 다녔고, 우리의 풍속도 바꾸어 놓았다. 서로 만나는 걸 꺼렸고,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도 규제하였다. 그래 재택근무, 자가 격리, 사회적 거리 두기 등의 말이 생겨났다. 대부분 사람이 바깥 활동을 자제하고 가정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자영업자를 비롯한 많은 사업가가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고, 실업자도 많이 생겨났다. 따라서 거리는 한산해졌고 생활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봄은 시작이요, 기다림이라 했다.
이 봄엔 코로나19가 우리 곁을 떠나기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래 만나는 사람마다 마스크를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생활했으면 더욱더 좋겠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영롱하게 빛나듯, 우리 모두 활짝 웃으면서 활기찬 생활을 하는 그런 봄을 기다려 본다.
(2021. 수필문학.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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