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밭에 왕대 나고
최중호
최영(崔瑩) 장군이 태어난 집에서 성삼문(成三問) 선생도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 집에서 두 명의 면장이 나왔고 현재도 군 의회 의원을 지내는 분이 있다고 한다.
그 집이 있는 곳은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이다. 최영 장군과 성삼문 선생이 태어난 곳 노은리. 그곳을 고려 시대에는 적동(赤洞)이라 불렀고, 조선 시대에는 금곡(金谷)이라 불렀다. 노은리(魯恩里)란 지명은, 조선조 숙종 때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단종의 왕호인 노산(魯山)에서 노(魯)자를, 은의(恩義)에서 은(恩)자를 따서 노은(魯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장군과 선생이 같은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두 분은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한집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장군은 고려 말기 선생은 조선 초기를 사셨던 분으로 후세 사람들은 두 분을 일컬어, 충신이라 부른다.
최영 장군이 고려 500년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명장이라면, 성삼문 선생은 단종의 왕위 보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학자다.
왕대밭에서 왕대가 나는 것일까? 최영 장군이 태어난 지 102년 만에 성삼문 선생이 태어났다.
호기심이 생겨 노은리를 찾은 것은, 매서운 봄바람이 소매 속으로 파고드는 날이었다. 그곳은 마을 입구 왼쪽으로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었고, 그 산자락을 따라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도 송죽(松竹)의 절의(節義)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산봉우리마다 하늘의 본성을 그대로 지켜 온 노송들이 우거져 있고, 집 뒤뜰엔 동갑 숲의 대나무가 푸르게 단장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삼백여 미터 걸으면 사육신 중의 한 분인 성삼문 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유허비란 어떤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 놓은 비석이다. 하지만 선생의 유허비는 오랜 세월을 지내 온 탓에 글자마저 희미해 읽기조차 어려웠다. 비문엔, ‘조선조 현종 때 충청도 관찰사였던 민유중(閔維重)이 노은리를 돌아보고 선생의 생가가 허물어진 것을 쓸쓸히 생각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이곳이 선생의 집터였음을 알리고자 돌을 준비한 후, 송시열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세우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유허비를 뒤로하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장군과 선생이 살았다는 집이 나왔다. 그 집에서 몇백 년 전의 장군과 선생이 살았을 리 없고 장군과 선생이 태어난 터에 있는 집이라야 맞을 것 같았다.
성삼문 선생은 수리봉 아래에 살았던 외조부 박첨(朴瞻)의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어머니가 산기로 신음하고 있을 때, 수리봉 상공에서 “아이를 낳았느냐?”며 세 번 묻는 소리가 났다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집 뒤엔 노은단(魯恩壇)이 있었다. 노은단은 대원군의 서원 철거 정책에 따라, 그곳 유생들이 노은 서원에 모셨던 사육신들의 위패(位牌)를 지하에 봉안하고 단(壇)을 모아 만든 묘였다. 다시 말하면 사육신들의 이름을 나무에 적어 합장한 묘라 하겠다. 여섯 분을 함께 모신 까닭인지, 봉분의 밑부분도 육각으로 되어 있었다. 여섯 분을 함께 모신 묘라고 하기엔 좀 작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충절들의 묘소를 만들어 그분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해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더 고마움을 느꼈다.
노은단에서 내려와 선생이 살았다는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 뒤와 옆엔 대나무 숲으로 우겨져 있었다. 대나무 숲 가까이 가서 바람결에 대나무 서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대나무들은 “선생이 평소에 매화 향기와 대나무를 좋아해 호(號)까지 매죽헌(梅竹軒)이라 지었는데, 매화는 없고 대나무만 남아 선생의 옛터를 지키고 있노라.” 말하는 것 같았다.
대나무는 항상 푸른빛을 띠고 있어 굳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대나무만으론 장군과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별로 실감 나지 않았다. 무슨 특징이 없을까 하고, 대나무 숲을 도닐며 집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별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려 할 때, 대문 바로 옆에 있던 굴뚝이 발걸음을 묶는다. 그 굴뚝을 타고 굵기가 다른 두 그루의 등나무가 나사 모양을 그리며 나란히 올라간 것이 아닌가.
비로소 나는 굴뚝을 타고 올라간 등나무에서 장군과 선생의 발 그림자를 그려 볼 수 있었다. 각각 뿌리를 달리하고 있는 두 그루의 등나무는 장군과 선생이었다. 굵기가 굵은 등나무가 장군이라면, 작은 등나무는 선생인 것이다. 장군이 태어난 후 102년 만에 선생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장군과 선생이 같은 터에서 태어난 것처럼, 크고 작은 등나무는 굴뚝 밑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등나무는 굴뚝이 깨질까 봐 조심스레 감싸 안으면서 위로 올라갔다. 장군은 위태로운 고려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온몸으로 부둥켜안았고, 선생도 단종의 왕위 보전(保全)을 위해 옥새를 껴안고 몸부림쳤다. 등나무는 굴뚝을 시계 방향으로 감고 올라갔다. 시곗바늘은 오른쪽으로 돌아야 정상적인 시간을 나타낼 수 있다. 만약 시곗바늘이 왼쪽으로 돈다면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돌려놓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이 순리의 역사라면, 흐름을 멈추거나 거꾸로 흐른 시간은 모반(謀叛)의 역사가 아닐까?
장군과 선생은 종묘사직과 왕위 보전을 위하여 충심(衷心)으로 임금을 보필했던 분이다. 두 그루의 등나무는 장군과 선생께서 추구하려 했던 정상적인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싶었다.
하지만 굴뚝의 높이는 한계가 있어 팔을 뻗쳐 더 올라가려던 두 그루의 등나무를 슬프게 했다. 길이가 짧아 올라갈 수 없었다. 더 오를 것을 체념한 두 그루의 등나무는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장군이 고려 500년 사직을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고, 선생이 충심으로 단종을 보필하려 했던 그러한 기도를….
등나무가 기도만으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던 것처럼, 역사의 수레바퀴는 두 충절의 기도만으로 굴릴 수 없었던 것일까. 고려 왕조도 단종의 왕위 계승도 오래가지 못했다.
등나무는 의지할 축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장군도 위화도에서 회군해 온 이성계 일파에게 죽임을 당했고, 선생도 수양 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등나무는 잎새를 달고 있지 않았다. 장군과 선생도 직계 후손들이 모두 화를 당해 처형되었기 때문일까?
등나무는 굴뚝을 오르다 정상에서 성장을 마감했지만, 굴뚝 끝까지 힘차게 오르던 줄기는 굴뚝 표면에 그 굵기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두 충절 모두 결국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기개와 지조만은 뚜렷이 남아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굵기가 다른 두 그루의 등나무는, 종묘사직과 왕위 계승을 위해 옳은 의지를 추구하려 했던, 장군과 선생이 남긴 그림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과 선생은 앞서가셨지만, 후세 사람들은 ‘적동에는 무장이요(赤洞之武), 금곡에는 문장이라(金谷之文).’ 말하지 않던가?
(1997. 수필공원.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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