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스러져 4월에 다시 핀 꽃
최중호
그 노래를 부르면 경찰이 잡아간다고 했다. 무서웠지만 나는 그 노래를 불렀다. 왜 그런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부르길래 따라 불렀다. 1959년에 유행했던 ‘유정천리’란 노래다.
이 노래가 유행할 즈음 자유당 정부에선 이승만 대통령을 연임시키기 위해 독재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그때 자유당 정권의 실정(失政)에 회의를 느꼈던 국민들은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1956년.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과 대적하기 위해 민주당에선 해공 신익희 선생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대부분 국민들이 자유당 정권에 등을 돌렸음인지, 신익희 선생의 한강 백사장 유세에 30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당시 서울시 인구가 160만 명이고, 유권자가 70만 명임을 생각하면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던 신익희 후보가 5월 5일 지방 유세를 하기 위해 호남지방으로 가던 중, 열차 안에서 서거하였다. 정권 교체를 원했던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절망하게 되었다. 절호의 정권 교체 시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에선 이승만 대통령이 출마하였고, 민주당에선 조병옥 박사가 출마했다. 하지만,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조병옥 박사가 신병 악화로 미국의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치료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충분히 승산이 있었던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였다. 해공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박사를 잃은 국민들은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때, 학생들 사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한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굽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유정천리’란 노래에 가사만 바꾸어 부른 노래다. 국민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운 심정을 달래고자 하였다. 이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어렸던 나도 따라 불렀다.
이 노래가 한창 유행을 하고 있을 때, 애처롭게 스러져간 한 송이 꽃봉오리가 있었다. 바로 17세 소년 김주열 열사다.
열사의 묘가 있는 남원을 향해 출발했다. 집에서 떠날 때는 날씨가 화창했는데 남원에 도착할 무렵부터 비가 내린다. 하늘도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해서일까?
그의 묘는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우비산 자락에 있었다. 원형으로 된 묘 앞에 두 기(基)의 묘비(墓碑)가 세워져 있다. 왼쪽 묘비에 ‘金君朱烈之墓(김군주열지 묘)라 새겨져 있다. 이 비에는 당시의 석학이었던 고려대학교 유진오 총장의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 일부를 보면 ‘아득한 소년의 의열이 민족의 명운을 좌우함이여, 군의 충과 의는 일월보다 밝고, 산과 해보다 크며, 그 장렬한 항쟁은 길이 청사에 빛날 것이다.’라 새겨져 있다. 비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964년 3월 15일에 세워진 것이다.
오른쪽 묘비에는 ‘열사 김주열의 묘’라 새겨져 있다. 그가 희생된 지 50주년인 2010년 4월 19일에 ‘김주열 열사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이다.
묘역에서 내려와 입구에 있는 기념관으로 갔다. 그곳에는 그의 약력과 사진, 그리고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문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졸업 후 취직할 수 있는 마산상업 고등학교(현 용마고)에 원서를 냈다. 1960년, 입학시험을 치르고 3월 14일에 있을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마산에 있는 이모 집으로 갔다. 하지만 합격자 발표가 16일로 미루어졌다. 15일이 대통령 선거일이라 선거부정을 저지른 자유당 정부에선 선거 전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합격자 발표일이 미뤄진 것이다. 그는 이모 집에 머물며 합격자 발표일을 기다렸다.
그때 자유당 정부에선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거리낌 없이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그 예로 40% 사전투표, 세 사람, 다섯 사람씩 모여 공개투표, 유권자가 아닌 사람이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을 자행했다.
국민들은 이러한 부정선거를 이미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유당과 정부를 불신하여 전국에서 크고 작은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3월 15일, 마산에서도 ‘부정선거 무효’를 외치며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했다.
그도 이모 집에서 시민들의 함성을 듣고 거리로 나와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시위대가 마산시청 쪽으로 향하자 이를 저지하던 경찰과 충돌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경찰이 쏘는 총탄과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여기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 날 이후, 그는 이모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남원에서 마산으로 와 아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마산경찰서 및 검찰청은 물론 시장과 골목을 돌아다니며, 아들을 찾아 달라 하소연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마산 시내에 퍼져나갔다. 그의 시신을 시청 앞 저수지에 버렸다는 소문이 돌자 저수지 물까지 퍼내 봤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아들의 책가방을 들고 “주열아”, “주열아” 외치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셨고, 목이 메인 목소리는 마산 시민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토록 아들을 찾아 헤매봤건만,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4월 11일 아침. 모든 걸 체념한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 날 오전 11시경, 마산 중앙 부두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한 낚시꾼이 바다에서 17세 소년을 건져 올린 것이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소년이 그동안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이라 했다. 이 소식은 부산일보의 ‘허종’기자에 의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구름처럼 몰려든 시민들의 위세에 당황한 경찰은 그의 시신을 간신히 마산도립병원에 안치시켰다. 이에 시민들은 경찰서로 몰려가 그의 시신을 인도해 달라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 하였다.
4월 13일 밤 11시. 그의 시신은 몰래 마산에서 출발하여 14일 아침 고향인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선산에 묻히게 되었다.
부정선거에 분노한 마산 시민들은 어린 학생의 처참한 죽음에 더 큰 울분을 터트렸다. 화가 난 시민들은 경찰서 및 자유당 당사 등으로 떼 지어 몰려가 격렬한 시위를 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폭동은 연일 계속되었다. 그 후 4·18 고대 학생 데모에 이어, 4·19혁명으로까지 이어져 나갔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했고, 이기붕 부통령은 아들이 쏜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4월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현대사의 흐름마저 바꾸어 놓았다. 김주열 열사는 자유당 독재 정권에 의해 3월에 스러져, 4월에 민주의 꽃으로 다시 피어났다.
비가 내린다. 그의 묘비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제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2018. 에세이문학.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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