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성으로 돌아오신 의자왕
최중호
햇빛이 노을에 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이 호수에 비치면 신화*가 되는가.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가신 의자왕이 사비성으로 돌아오셨다 한다. 오시는 길엔 백제의 마지막 충신인 계백이 황산벌에서 왕을 영접하셨을 것 같다. 의자왕의 영혼이 선조들의 능원(陵苑)이 있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돌아오실 때, 계백은 그 일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영혼의 안식처*를 사비성으로 오는 길목에 마련해두고 있었다. 죽어서도 자신이 섬기던 왕을 지켜드리겠다는 충신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 것일까?
의자왕이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능산리 고분군(古墳群)으로 갔다. 능(陵)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엔 오는 손님을 반기려는 듯, 소나무도 가지를 계단 쪽으로 기울여 햇볕을 가려주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왼쪽으로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扶餘隆)의 능이 각각 모셔져 있다. 왕릉도 유행을 따라 조성하는가. 봉분도 원형이 아니라 장방형(長方形)이다. 의자왕과 부여융의 능은 왕의 능이라고 보기엔 규모가 좀 작은 편이었다. 부자(父子)가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나라의 흥망성쇠나 개인의 부귀영화도 지나고 보면 한낱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왕이 수도를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옮긴 후 전성기의 영화를 누렸던 백제. 의자왕도 처음엔 정사를 잘 보살폈다. 외교에도 밝아 고구려는 물론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친교를 맺었고, 세력 확장을 위해 신라의 많은 성을 공격해 영토를 넓혀 나갔다.
하지만 백제의 융성은 신라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는 무력에 의한 공격보다는 지략으로 백제를 공략하기로 하고, 첩자와 미녀들을 사비성으로 보내 의자왕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이른다. 총명했던 의자왕도 신라의 계략에 빠진 후부터는, 정사(政事)엔 관심이 없고 주지육림 속에서 방탕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의자왕에겐 계백, 성충, 흥수 등의 충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제의 국운이 기울어져 감을 알고, 왕께 정사에 신경을 써줄 것을 수차례 간언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성총(聖聰)이 흐려질수록 간신들이 득세하는 법, 오히려 왕은 그들의 말만 믿고 성충을 옥에 가두고 흥수는 귀양을 보냈다.
이러한 정국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니, 사비성엔 충신 중 마지막 보루인 계백만이 의자왕 곁에 남아 있었다. 그동안 충신들이 군사증원을 요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아 사비성에는 군사가 별로 없었다.
계백은 앞이 캄캄했다.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천의 군사로 오(吳)나라의 칠십만 대군을 격파했다지만, 계백과는 처지가 달랐다. 구천이 지리적으로 유리한 요새를 택하여 전투를 했다면, 계백은 요새를 잃은 채 밀려오는 신라군을 맞아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신라군 오만을 맞아 싸워야 할 군사라야 겨우 오천 명, 거기에 당나라의 십삼만 대군이 금강하구를 따라 사비성으로 올라온다는 첩보까지 접했다.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아무리 용맹한 계백의 군사라 한들 신라군과 싸워 이길 승산은 없었다. 모든 걸 체념하고 집으로 돌아간 계백은, 아내와 자식의 목을 벤 후 집에 불을 질렀다. 후환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비장한 각오로 전장에 나선 계백. 그를 따르는 오천 결사대의 기개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오천 결사대는 계백의 뒤를 따라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대치했다. 백제군은 그곳에서 신라군을 상대로 싸워 네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다시 시작된 전투에서 어린 관창을 사로잡았으나, 계백은 그의 용맹을 칭찬한 후 되돌려 보냈다. 하지만 관창이 다시 쳐들어오자 이번엔 관창의 목을 베어 신라군 진영으로 보냈다. 그것이 문제였다. 격전 때마다 패배를 거듭했던 신라군이었지만, 관창의 피는 그들을 격분시켰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분기충천(憤氣衝天)하여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신라군 앞엔 백전노장 계백도 어쩔 수 없었다. 혈전에 혈전을 거듭했지만, 결과는 중과부적(衆寡不敵). 백제의 정예군이 황산벌에서 하나둘씩 쓰러져 나갔고 계백도 여기서 최후를 마치니, 칠백 년 백제 사직도 계백의 전사와 함께 끝을 맺게 된다.
한편, 의자왕은 계백이 황산벌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자들과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했으나 이내 체포되어, 갖은 수모를 겪은 후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간다.
이때 당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은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 군신(軍臣) 등을 합해 일만 이천팔백구십오 명이다.
백제의 포로들을 실은 배가 백강을 지나 금강 하류로 내려간다. 성흥산성을 안고 강경을 거쳐 양화면 입포리를 지날 때, 왕의 일행이 잠시 그곳에서 머물지 않을까 생각하여, 많은 여인이 모였다. 하지만 왕의 일행은 그곳에서 머물지 않고 떠났다. 여인들은 가시는 왕을 멀리까지 바라보기 위해 유왕산(留王山)*에 올랐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 그들을 보내는 백제 여인들의 심정은 오죽하였을까?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유왕산. 왕의 일행을 태운 선단은 보이지 않고 유왕산 마루엔 여인들의 통곡 소리만 남아 강물과 함께 서해로 흘렀다.
당나라로 끌려가신 의자왕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살면서, 백제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다 북망산(北邙山)에 묻혔다. 예로부터 왕족들의 무덤이 많아 죽음의 대명사로 불리는 북망산. 싸늘한 밤바람이 무성한 잡초를 흔들고 지날 때면, 귀신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음산하기만 한 북망산. 이곳에서 의자왕은 오(吳)나라의 마지막 왕 손호(孫皓)와 진(陳)나라의 마지막 왕 진숙보(陳叔寶) 곁에 묻혔다. 하지만 누가 있어 백제의 해동증자(海東曾子)요 마지막 왕인 의자왕에게 향화(香火)를 올렸을까? 의자왕이 붕어(崩御)한 후 세월은 흘러 당나라도 패망하였고, 그 후에도 여러 왕조가 세워졌다가 다시 패망했다.
1995년, 잊었던 사람을 그리워하듯 의자왕을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하남성 낙양시 맹진현의 봉황대촌 부근이 의자왕의 묘역이었음을 확인하였다. 그 후 부여군과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시가 자매결연을 하고, 낙양시로부터 부여융(扶餘隆)의 묘지석(墓誌石)* 복제품(複製品)을 기증받았다. 그리고 2000년 4월엔 북망산에서 의자왕의 영토(靈土)*를 모셔와 고란사에 봉안한 후, 9월 30일 선왕의 능원이 있는 능산리에 모시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의자왕은, 붕어(崩御)한 후 천 삼백 사십년 만에 태자 부여융과 함께 사비성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능역에서 사비성을 바라보니 백제의 최후를 보여주려는 듯 태양도 서산마루에 걸려있다. 노을이 하늘을 점점 붉게 물들인다.
능 주위를 거닐어 본다. 많은 소나무가 능을 에워싸고 있다. 능 주위에 있는 소나무들이 마치 왕을 모시는 신하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한데 그 형상이 묘하게 생겼다. 능 가까이 있는 소나무들은 허리가 구부러져 있고, 뒤편의 소나무들은 올곧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능역의 소나무들을 보면서 의자왕을 모셨던 신하들을 생각해 보았다. 구부러진 소나무가 신라와 내통을 하면서 의자왕께 갖은 아첨을 다 하던 임자(任子)나 미곤(未坤)과 같은 간신이라면, 뒤편의 꼿꼿한 소나무는 계백과 성충, 흥수를 비롯한 황산벌의 오천 결사대가 아닐까?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의자왕과 부여융을 뒤로하고 능원을 나설 땐, 하늘의 초저녁 달이 능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 이병주의 대하소설 「산하」의 서문에 나오는 퇴어일광즉위역사, 염어월색즉위신화(褪於日光則爲歷史, 染於月色則爲神話)란 글이다.
* 영혼의 안식처 : 계백 장군의 묘가 대전에서 부여로 가는 국도변(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뒷산)에 있어서, 의자왕의 영토를 모셔오는 길목으로 표현하였다.
* 유왕산(留王山) : 충남 부여군 양화면 입포리에 있는 낮은 산. 의자왕이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뱃길로 끌려갈 때 많은 사람이 산에 올라 왕을 태운 배가 입포리 포구에서 머물다 가기를 바랬다 하여 유왕(留王)이라 부른다.
* 묘지석(墓誌石) :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등을 새겨 무덤 옆에 파묻는 돌. 부여융(扶餘隆)의 묘지석은 1920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되어, 그가 682년 68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묘는 북망산 청선리(淸善里)에 묻혔음이 확인되었다.
* 영토(靈土) : 묘가 있던 곳의 흙.
(2003. 수필춘추.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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