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장관과 두 용사
최중호
죽어서까지 서울을 지키다가 45년 만에 대전으로 내려온 용사들이 있다. 그 용사들의 유해가 지난 6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된다고 했다. 벌써 두 달이 지났으니 지금쯤 두 용사는 대전현충원에서 편안히 잠들어 계실 것이다.
대전현충원으로 갔다. 대전에 살면서도 대전현충원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가보고 싶었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 가지 못한 것이다.

용사들이 안장(安葬)되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관리소에 들렀다. 그러나 아직 안장 절차를 마치지 않아 봉안실에 계시다고 한다. 봉안실은 병원의 영안실과 같은 곳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이나 유해를 안장하기 전까지 모시는 곳이다.
두 병사가 문을 지키고 있는 봉안실. 그곳은 짙은 향 내음만 밖으로 흩날릴 뿐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오게 된 동기를 말하니, 문을 지키고 있던 한 병사가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나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한다. 나는 “두 용사의 충정(忠貞)에 마음이 끌려 술을 한잔 올리고자 왔다.”고 했다. 밖에서 기다리라 한다. 안으로 들어간 책임자는 어디선가 두 구(具)의 유해를 모셔다가, 차례로 단 위에 올려놓고는 들어오라 했다.
봉안실 정면에는 병풍이 드리워져 있고, 그 앞쪽으로 유해를 모시는 단(壇)과 제물을 올려놓는 제상(祭床)이 하나 있다. 두 용사의 유해는 ‘故 무명용사’란 이름으로 태극기에 싸여 있었다. 대전현충원에 올 때만 해도 나는 그분들의 유해를 볼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만 그분들이 안장된 묘역에 가서 술이라도 한잔 올리고자 마음먹었다. 하나 이곳에 와서 뜻밖에도 그분들의 유해를 보니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두 달 전 어느 신문에서 ‘백운 산장의 두 국군’이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6·25전쟁이 나자 정부는 3일 만에 서울을 포기하고 수도를 대전으로 옮겼다. 따라서 27일엔 대통령 이하 모든 정부의 고위 관료들도 대전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날 밤 미아리에선 인민군에게 패배한 국군 이 백여 명이 북한산 백운 산장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후퇴한 국군이 주먹밥과 간장으로 허기를 면하고 있을 때, 인민군 탱크와 기관포는 밤새 북한산을 향해 포격을 가하며 점점 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연락과 보급로가 끊긴 국군은 인민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제대로 대항도 못 하고 뿔뿔이 흩어져 북한산을 떠나야만 했다.
이때 한 장교와 연락병만이 북한산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였다. 더 나은 작전을 위해선 후퇴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서울 시민을 남겨두고 후퇴할 수 없다는 투철한 군인 정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힘으로 서울을 지킨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후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인민군이 눈앞에 보일 때까지 최선을 다해 용감하게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서울은 지켜야 했다.
선열(先烈)들이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 했듯이, 그들도 그러했다. 그들이 서울을 지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자결뿐이었다. 자결하여 그 영혼이라도 서울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장교는 자결하기 전 백운 산장에 있던 한 청년에게 자신의 유품을 맡기며 가족에게 전해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청년도 상황이 급했던지라 피난을 떠나야 했다. 따라서 그들의 시신도 돌보지 못한 채, 유품만 기와지붕 속에 숨기고 백운 산장을 떠났다.
거두어 줄 사람 없는 장교와 연락병의 시신은 그렇게 백운 산장 앞에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휴전 후, 청년은 장교의 유품을 전해 주기 위하여 주소가 적혀 있는 서울 삼선교 부근으로 갔으나, 유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쟁 직후 혼란한 사회에서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장교의 이름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장교와 연락병은 이름 없는 무명용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해 가을, 장렬하게 산화한 두 용사의 소식을 전해 들은 한 장교가 마을 주민과 더불어 그들의 유해를 산장 부근에 묻어 주고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그 후, 1959년 6월에는 그 장교가, 그들이 산화한 백운 산장 마당에 ‘백운의 혼’이란 추모비를 세워줬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국방부가 마침 6·25전쟁 45주년을 맞아 두 용사의 유해를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기로 했던 것이다.
태극기에 싸여 있는 두 용사의 유해를 다시 본다. 이름도 영정도 하나 없이 ‘故 무명용사’라 쓰인 글씨가 더욱 애처롭게 보인다.
“용사들이시여, 그날의 굳센 용기와 의지는 다 어디에 두고, 빛나는 훈장 대신 무명용사란 이름으로 돌아오셨단 말입니까.”
향을 태운 연기가 두 용사의 유해를 맴돌고 있다. 이윽고 그 연기는 유해를 감싸 안고는 흩어질 줄 모른다. 유족이나 연고자가 찾아올 때까지 흩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곁에서 영혼을 밝혀 주던 황 촛불도 그 광경이 서러운 듯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준비해 간 제물을 상 위에 차려 놓고 술잔을 올렸다.
“영령이시여, 인제 그만 슬픔을 거두시고 아늑한 계룡산 자락에 안겨 고이 잠드소서. 그리고 틈이 나거든 그리워하던 전장(戰場)의 전우들도 만나 보소서.”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더 늦게 대전현충원을 찾았더라면 두 용사의 유해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안장 절차를 마친 두 용사의 유해는 현충탑 아래에 있는 봉안당에 모셔졌을 것이고, 그곳은 통제구역이라 내가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봉안실을 나와 애국지사들이 잠들고 있는 묘역으로 갔다. 묘비를 둘러 봐도 처음 보는 이름들뿐이다. 혹시 아는 이름이라도 있을까 싶어 위쪽으로 올라가는데, 낯익은 이름이 하나 있다. ‘애국지사 ○○○의 묘’라 새겨진 비문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여기 계신 ○○○이란 분은 한국전쟁 당시 국방 장관으로 계셨던 분이 아니던가. 그렇게 되면 국방 장관과 두 용사가 대전현충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국방 장관께도 술을 한 잔 올렸다. 그리고 국방 장관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신고하는 두 용사를 그려보았다.
“신고합니다. 장교 ○○○외 사병 일 명은 45년간 서울을 사수하다 인제서야 대전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두 용사는 나라를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후, 북한산 찬바람 속에서 45년간 서울을 지켜 왔다. 미처 시민들이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수도 서울을 지키려 했던 용사들이다.
국방 장관은 두 용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불가피한 사정으로 3일 만에 서울에서 후퇴한 국방 장관과 45년 만에 후퇴한 두 용사가 대전현충원에 와서 만나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1995. 수필문학.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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