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충정으로 피워 낸 혈죽(血竹)

여강 선생 2021. 11. 7. 20:59

                                                         충정으로 피워 낸 혈죽(血竹)

 

                                                                                                         최중호

  대나무는 충신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절개가 선죽(善竹)을 키웠다면,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지조는 혈죽(血竹)으로 피어났다. 선생의 맺힌 한이 얼마나 컸기에, 순절(殉節)한 곳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단 말인가?

  초등학교 시절, 두꺼운 갈색 표지로 된 간추린 국사 책을 본 적이 있다. 무슨 책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유서에서 그만, 시선이 머물고 말았다.

  「이 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유서는, 어린 내게도 적지 않은 감동을 주고 말았다.

  선생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고종 황제에게는 내외 종간이었다. 이렇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선생은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치며, 말년에 고종 황제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유럽을 순방하면서 국제 정세에도 밝은 안목을 갖추게 된다.

  그 무렵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누르고, 우리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을사늑약을 체결해 버렸다. 이에 우리의 외교권은 일본에 강제로 박탈되고, 우리의 선각자들은 빼앗긴 외교권을 찾기 위해 울분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 放聲大哭)며 울부짖을 때, 선생을 비롯한 다른 선각자들은 을사늑약의 체결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건만 소용이 없었다.

  빼앗긴 외교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에 의해 외교적으로 고립된 우리 민족은, 억울한 사정을 어디에다 호소해야 한단 말인가?

  선생은 점점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만 답답할 뿐 달리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서대문 밖에 있던 전동*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 본 후, 울분으로 타오르는 가슴을 말없이 달래며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지내봤지만,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은, 자신의 힘으로는 이미 기울어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에 역부족임을 알고 자결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선생의 심정은 착잡했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괴로운 심정으로, 이천 만 동포와 해외 공관장, 그리고 고종 황제께 드리는 유서를 써 놓았다. 그리고는 평소 간직하고 있던 단도를 꺼내어 할복(割腹)한 후,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다시 목을 찔러 순절하였던 것이다. 이때가 19051130일 오전 6. 선생의 나이 45세였다.

  선생의 순국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삽시간에 많은 사람이 선생의 집에 몰려와 나라의 기둥이 쓰러지고, 큰 별이 떨어졌다.며 통곡하였다. 그 후 선생의 뒤를 따라 뜻있는 많은 사람이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이렇게 어수선한 시국으로 1년이 지났다.

  선생의 부인도 선생을 잃은 슬픔에 잠겨 무료한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7월 어느 날, 선생의 유품을 보관해 두었던 방에 환기라도 시킬까 하고 문을 열었을 때,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난데없이 방 한가운데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선생이 살아 계실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방에 대나무가 자라다니ּּּ···.

  무슨 까닭일까? 선생이 유서에 남긴 유언처럼, ‘영환은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이 결코 헛되지 않았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의 민속 신앙에도 대나무를 신간(神竿)이라 하여 신이 여기에 강림한다고 믿었으며, 사철 푸르고 곧게 자란다 하여 대쪽같은 절개를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어쩌면 선생의 유품을 보관했던 방에서 자란 대나무에, 선생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대나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선생의 방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걸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 슬픔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대나무가 선생이 순절할 때 흘린 피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 하여, ‘혈죽(血竹)’이라 부르며 용기를 갖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이 혈죽에 어떤 믿음을 갖고 합심 단결하여 독립하려는 의지를 보이자, 당황한 일본군은 혈죽을 구심점으로 우리 민족이 단결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혈죽을 뽑아 버렸다.

  하지만, 선생의 순국은 사람들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고, 혈죽 또한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아 주는 원동력이 되어, 후 일에 있을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선생의 영혼이 피워 낸 혈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90여 년 전에 뽑힌 혈죽을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선생의 묘소에 가면 혈죽이 있을까 하여 경기도 용인*으로 갔다. 선생의 묘소에 참배한 후 주변을 둘러봤지만, 혈죽은 보이지 않았다. 상석 위에 켜 놓은 촛불만이 애통함을 참지 못해 촉루가 흘러 대나무 잎과 같은 무늬를 만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민영환 선생의 묘

  그 후에도 계속 관심을 갖고 선생에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서 수소문한 결과 혈죽의 소재를 알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뽑힌 혈죽은 선생의 부인이 몰래 보관해 오다가, 선생의 손자에 의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다.

  혈죽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한 마음을 안고 서울로 갔다.

  미리 전화해 놓은 까닭에 박물관이 쉬는 날인데도, 김 연구사를 비롯한 여러 직원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곳에 진열된 많은 선생의 유품 중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진열장 안에 걸려 있는 화려한 선생의 관복이었다. 개화기 신식 군대의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을 지냈던 선생의 관복은, 영국 왕실의 근위병 복장과 비슷한 것이었다.

민영환 선생 유품
혈죽

  관복 옆에 있는 선생의 사진을 본다.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있는 선생은 늠름한 장군이었다. 예리한 눈으론 일본군의 흉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표정 한구석엔 무언지 모를 우수가 짙게 깔린 듯 보였다. 선생은 방에서 솟아 나온 혈죽 사진과 함께 있었다. 일본인 기쿠다(菊田)가 찍었다는 혈죽 사진에다, 선생의 모습을 함께 합성해 걸어 놓은 것이었다.

  선생은 영광스러운 명예를 갖고 높은 관직에 머물면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생활했을 텐데, 왜 자결을 했을까? 개인의 부귀영화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만백성 앞에 사죄하고 나라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하고자.자결하였던 것이다.

  사진 밑으로 선생의 명함이 보인다. 선생은 순국하기 전, 이 명함에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이란 유서를 써 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면 혈죽은 어디에 있는 걸까?

  명함 앞에 ‘閔忠正公血竹(민충정공혈죽)’이라고 쓴 표지와 함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그 혈죽이 아니던가.

  혈죽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리며 얼굴이 상기되어 옴을 느꼈다. 풍전등화와 같은 참담한 나라의 운명을 울분으로 삭여야 했던, 선생의 자결 순간이 내게로 전이되어 오는 것일까. 어쨌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혈죽은 표지 옆에 길게 네모진 상자 안에 남보라색 융단을 깔고 누워 있었다.

  90여 년을 말없이 지내 온 혈죽은, 갈색으로 변해 버린 대나무 가지와 마른 잎들이었다. 이 혈죽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고, 그들의 가슴에 독립 의지를 심어 주었던 것이 아니던가.

  다시 선생의 방에서 피어난 사진 속의 혈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4줄기 9가지에서 피어난 45장의 잎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선생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 진정 깊었을 텐데, 선생은 분명 혈죽으로 무엇인가를 나타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혈죽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옛 어른들은 미래를 암시할 때 쉬운 글자보다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파자(破字) 등을 이용해, 그 의미나 뜻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선생도 그렇게 하였단 말인가. 둔한 머리로는 혈죽이 의미하는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4에다 9를 곱하면 36이 된다. 그렇다면 36이란 숫자는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을 것이고, 혈죽 가지마다 웃는 듯 활짝 피어난 45장의 잎은, 45년이 되는 해에 해방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이 고귀한 피를 흘리며 순절하신 지 90여 년, 선생의 충정(忠貞)으로 피워 낸 혈죽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 전동 : 민영환 선생의 집이 있던 곳으로, 오늘의 종로구 견지동의 옛 이름이다.

* 경기도 용인 : 민영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마북리에 있다.

*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 1904년에 설치한 조선 시대의 관직으로 임금의 좌우(左右)에서 시종하는 일을 맡은 우두머리로 대장(大將) 또는 부장(副長)으로 임명하였다.

 

                                                                                  (1998. 육군.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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