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밀사(密使)
최중호
‘돌아오지 않는 밀사(密使)’란 영화가 있었다. 구(舊) 한말 일본에게 빼앗겼던 우리의 주권을 다시 찾고자, 고종황제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세 분의 밀사를 파견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는 슬픈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헤이그에 간 밀사들이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우리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했으나 별 효과가 없자, 분(憤)을 참지 못한 이준 열사(烈士)가 할복(割腹)하여 자신의 창자를 회의장 테이블 위에 던지고,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준 열사의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헤이그를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어디 그런 기회가 쉽게 올 수 있다 하던가?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다.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던 소망이 이루어질 기회가 생겼다. 마침 교육부에서 공고 기계과 교사 해외 연수 계획에 따라, 내게 독일의 대학에 가서 3개월간 수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독일에 가면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가서 이준 열사의 묘소에 참배하고 싶었다.
그때 열사의 묘소에 향불을 피워 드리고자 향을 준비한다. 하지만 향은 약해서 쉽게 부러질 염려가 있어서 가져가기가 불편했다. ‘어떻게 가져갈까?’ 하고 궁리한 끝에 문익점 선생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올 때의 일화가 생각나, 그리해 보기로 하였다. 붓 뚜껑 대신 볼펜 껍데기를 이용하였다. 볼펜에서 심(芯)을 빼낸 후 향을 절반으로 잘라 그 속에 넣고 닫았다.
독일에 도착하니 한국과는 달리 모든 게 낯설고 어설펐다. 그곳에서는 학교의 수업도 금요일까지만 했다. 따라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여유가 있어, 주로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며 견문을 넓힐 수가 있었다.
오늘은 수업이 끝나는 대로 스웨덴으로 간다. 국제선 열차를 타기 위해 우리가 머물고 있던 다름스타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하지만 우리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을 땐, 스웨덴으로 가는 국제선 열차는 이미 떠나버린 후였다. 행선지를 스웨덴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 외의 달리 정한 목적지는 없었다. 이참에 동료들에게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갈 것을 제의해 보았다. 스웨덴 외에는 특별히 정해 둔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에 행선지를 쉽게 헤이그로 바꿀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열차를 타고 쾰른을 거쳐 7시간 만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였다. 밤늦게 도착하여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이튿날 아침 다시 열차 편으로 헤이그로 갔다.
헤이그의 와건스트리트(Wagenstraat) 124번지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 이 건물은 1620년에 건축된 헤이그의 고옥(古屋) 중 하나로, 그동안 가정집, 상가, 호텔, 당구장 등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이준 열사가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오셨을 당시에는 드용(De Jong)이란 호텔로, 세 분의 밀사도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한 유래로 인하여 우리의 교포인 이기항(李基恒) 씨가 사재를 털어 이 건물을 구입한 후, 전경련과 정부의 후원으로 열사의 88주기인 1995년 8월 5일에,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개관을 한 것이다.

흰색으로 된 3층 건물엔 영어로 ‘YI JUN PEACE MUSEUM’이라 쓰여 있고, 1층 입구의 세로 간판엔 한글로 '이준 열사 기념관'이라 새겨져 있다. 좁은 층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방마다 각각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중 맨 첫 번째 방이 ‘이준의 방’이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중앙에 계신 이준 열사의 흉상(胸像)이 우리를 맞는다. 넓은 이마에 준엄하면서도 인자한 용모를 갖추신 열사는,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계셨다.
‘호마(胡馬)는 언제나 북쪽 바람을 향해 서고, 남쪽 월(越) 나라에서 온 새는 나무에 앉아도 남쪽으로 향한 가지에만 골라 앉는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 했던가.
열사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설움을 눈에 담고 계셨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애타게 조국을 그리던, 열사의 향수에 젖은 눈빛이 나를 슬프게 한다.
고종황제의 밀서를 품고 헤이그에 도착하신 세 분의 밀사를 그려본다. 정사 이상설(李相卨), 부사 이준(李儁), 종사관 이위종(李瑋鍾) 일행이 헤이그 만국회의장에 도착했을 때, 밀사들은 을사늑약에 대한 일본의 국권 강탈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폭로하여, 각국 대표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일본 대표들의 방해로 회의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밀사들은, 일본의 국권 침략을 폭로하는 호소문을 연서(連署)로 작성하여 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보냈으나, 회의장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영어, 불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장 앞에서 ‘축제의 뼈다귀*’란 이집트 속담을 인용해 기자회견을 했으나, 각국 언론의 관심을 끄는 데 그치고 말았다.
본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 열사는, 분함을 가슴으로 삭히면서 단식을 계속하셨다. 순사(殉死)하기 전날 의식을 잃었던 열사는, 저녁 무렵에야 느닷없이 일어나서 “이 나라를 도와주세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있습니다”라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쥐어뜯다가 끝내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헤이그 밀사들에 의해 세계만방에 일본의 침략상이 폭로되자, 국위를 손상당한 일본은 그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물어, 황위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황태자(순종)에게 자리를 넘기도록 하였다. 또한, 이완용 내각은 궐석(闕席) 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위종, 이준에게는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이러한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돌아가신 후에도 죄인이 된 이준 열사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헤이그 현지에서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두 분의 열사도 죄인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기약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이준 열사의 방에는 유족들이 기증한 친필 이력서와, 헤이그 밀사를 자청했던 자필 청원서 등 여러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된 유품을 보면서 열사의 인생관과 더불어 일사보국(一死報國)의 국가관을 알 수 있었다.
이어 만국평화회의 한국자료실로 갔다. 이곳에는 만국평화회의 한국 관계 자료가 전시된 곳으로, 만국평화회의보(萬國平和會議報)를 비롯한 세분 열사의 여로(旅路), 만국평화회의 초청국 명단과 초청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우리나라가 만국평화회의에 초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정식으로 초청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인하여 고종황제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세 분의 밀사를 헤이그에 파견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1997년 열사의 자료를 조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자료에는 우리나라가 12번째로 초청국 명단에 올라있었다.
기념관에는 이준의 방 이외 만국평화회의 한국자료실, 이상설의 방, 이위종의 방 등, 8개의 방이 있어, 방마다 그 이름에 맞는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1907년 7월 14일 이준 열사가 돌아가신 후, 그 유해는 헤이그에 있는 네오 에이켄듀이넨(Nieuw Eykenduynen)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56년이 지난 1963년에 열사의 유해는 수유리로 이장되었고, 이곳엔 열사의 묘적지(墓蹟地)*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기념관을 관람한 후 문제가 생겼다. 같이 갔던 동료들이 이준 열사의 묘적지에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공동묘지라면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인데, 이곳까지 와서 경치 좋은 곳을 놔두고 묘지에 갈 리가 있겠는가. 그곳을 가자는 것은 나만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상징인 풍차를 보러 간다 했다. 하는 수 없이 동료들과 오후 3시에 암스테르담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헤어졌다.
전철을 타고 이준 열사의 묘적지(墓蹟地)*가 있다는 공원묘지로 간다. 가면서도 잘못 내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전차 안에 붙어 있는 노선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긴장된 상태로 열사의 기념관에서 약 4㎞ 떨어져 있는, 캄퍼 포엘리스트리트(Kampe rfoeliestraat)에 있는 네오 에이켄듀이넨 공원묘지에서 내렸다.
넓은 공원묘지를 보는 순간 당황이 된다. 묘지에 가면 쉽게 열사의 묘적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넓은 공원묘지에서 어떻게 열사의 묘적지를 찾는단 말인가? 이것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동 호수도 모른 채, 무턱대고 김 서방네 집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벌은 침(針)만 믿는다고, 독일어는 물론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나도 믿는 데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올 때 가지고 온 ‘6개 국어 회화집’이란 책이다. 그 책에는 영어를 비롯한 독일어, 불어 등 6개국의 기본 회화가 한국어와 함께 실려 있어서, 외국어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쉽게 기본 회화를 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래 그 책을 꼭 배낭 속에 넣고 다녔다
하지만 배낭을 아무리 뒤져봐도 책이 없다. 내가 믿고 의지할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나 혼자 있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 등에선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유럽에 와서 동료들과 처음 헤어진 것이라 더욱 당황이 되었다. 유럽의 지도 한 장 없는 처지에 회화책마저 없으니, 동료들을 못 만난다면 혼자 독일까지 돌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팡이를 잃어버린 소경처럼, 힘이 쑥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있다면 낯선 영혼(靈魂)들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墓碑)들만, 내 곁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뿐이다. 반기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묘역이, 내겐 더없이 외롭고 쓸쓸하기만 하였다.
이곳에서 짧은 시간에 이준 열사의 묘적지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역 단위로 이루어진 묘역을 한 구역 한 구역 비문을 읽어가며 찾아야만 했다. 세월없는 붓 장수라면 모르겠지만, 암스테르담에서 동료들과 약속한 시간에 만나기 위해선, 이곳에서의 시간은 1시간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다. 이렇게 찾다간 하루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은 더 초조해졌고, 다른 한 편으론 내가 하는 일이 한심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어떻게 쉽게 찾는 방법이 없을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찾다간 열사의 묘적지를 보지도 못하고 동료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나를 보고 뭐라고 말을 할까? ‘그러면 그렇지 여기가 어디 한국인 줄 아나, 배짱 좋게 떨어져서 혼자 묘적지를 찾겠다며 나서더니, 그것 참 잘되었다’며 비웃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도 없었다. 이곳에 와서 얻은 것이 있다면 혼자 떨어져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외로움과 절박한 두려움만 절실하게 실감했을 뿐이다. 시계를 볼 때마다 입술이 탄다. ‘도대체 열사의 묘적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숨만 저절로 나왔다. ‘어떻게 쉽게 찾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잎이 빛을 바꾸고 나무가 이파리를 벗는 가을이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따라가던 눈길이 낙엽을 쓸어 모으는 청소부한테 가 머문다. 이곳에 와서 처음 본 사람이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헬로 헬퓨”까지는 했으나, 다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주제에 청소부를 만난 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곳이 설령 한국이라 할지라도 공동묘지에서 ‘묘가 있었던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이곳은 네덜란드가 아닌가. 그림의 떡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말이 막혀 청소부만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당황한 탓에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이다. ‘무덤’이란 영어 단어가 영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도 안타까운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이 흘렀다.
“이준 텀 웨어(Yi jun tomb where).” 그가 더 반갑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오! 코리아”라 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갔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내가 서 있던 곳에서 1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 이준 열사의 묘적지가 있었다.

묘적지에는 기념관에서 본 모양과 크기가 똑같은 흉상이 모셔져 있었다. 흉상 앞에는 제단이 있고, 오른쪽에는 ‘일성 이준 열사의 묘적’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제단 위에 있는 꽃병에는 언제 누가 와서 꽂아놓고 갔는지 하얀 국화가 꽂혀있다. 꽃이 싱싱한 것으로 보아 다녀간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코끝에 스치는 그윽한 국화 향기에서 조국을 사랑하고 열사의 충정을 기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지금까지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던 내 가슴에까지,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열사는 순국하신 후 56년간 이곳에 잠들어 계시다가, 70주기가 되던 지난 1963년에야 조국으로 돌아가셨다. 기나긴 세월을 낯선 이국땅에서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지내셨던 것이다.
열사께 참배한 후 비디오카메라로 묘적지를 촬영했으나 아쉬움이 남는다. ‘이곳까지 와서 열사의 흉상 곁에서 사진 한 장 못 찍고 돌아가다니….’
혹시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있나 하고 둘러봤으나 아무도 없다. 조금 전에 나를 안내해 줬던 청소부도 보이지 않는다. 아쉬웠다. 동료들과 암스테르담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좀 남아 있었다. 이번엔 멀리 둘러보았다. 50여 미터 되는 거리에 아이 하나를 데리고 온 부부가 누군가의 묘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그곳으로 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럴 땐 아무래도 세계 공통어인 보디랭귀지가 제일인 듯싶었다.
“헬로우, 헬퓨”하며 손끝으로 카메라 셔터를 가리켰다. “오케이”하며 중년 남자가 선뜻 나를 따라나선다. 열사의 흉상 곁에 자세를 취하고, 그곳을 다녀왔다는 증거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마음이 후련하다. 하지만 그래도 미련은 남는다. 열사의 기념관에 갔을 때 제물(祭物)도 준비하지 못하고, 향불도 피워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차를 타고 기념관 근처에서 내린다는 것이 훨씬 못미처서 내렸다. 기념관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며 지나는 사람들한테 물었다. 무어라 대답은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금 가다 묻고 다시 묻기를 수차례, 주변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몇 바퀴 돈후에야 그곳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왜 다시 왔느냐?”고 묻는다. “열사를 빈손으로 찾아와 뵙고 떠나는 것이 부끄러워서 다시 왔다”고 말한 후, 문 입구에 있는 모금함에 작은 성의를 표시했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헤이그 역까지 걸어서 갔다.
암스테르담행 열차에 오르니, 긴장이 풀리면서 몸도 풀린다. 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긴장된 순간의 연속이라 점심도 먹지 못한 것을,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마음이 편해야 배고픔도 느끼는 걸까.
달리는 열차의 창가에서 보는 만추(晩秋)의 들판 풍경이 아름답다. 돌지 않는 풍차를 보며 눈을 감는다.
* 축제 때의 뼈다귀 : 1907년 7월 5일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장 정문 앞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인용한 이집트의 속담. 이위종은 기자회견에 앞서 ‘이집트인들은 잔칫상에 뼈다귀 하나를 올려놓는 습관이 있다. 그 이유는 회식을 즐기는 사람에게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불멸의 신의 섭리로 열리게 된 이번 헤이그 잔치에도 불행하게도 이집트의 뼈 다귀가 나타났다.’ 회의장에 참석하지 못한 세 분의 밀사들은 자신들이 그 옛날 이집트 뼈다귀의 현대판이 되어 있음을 비유한 후,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 묘적지(墓蹟地) : 묘가 있었던 자리.
(2001. 에세이문학.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