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0 6 호
최중호
집 없는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심하다. 결혼 후 계속 전세를 살았다. 정이 들고, 살림도 제자리를 찾을 만하면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도 곁방에 살던 주인이 애를 낳더니 안채를 비워 달라고 했다. 며칠 동안 집을 구하러 다녔으나 헛수고였다.
그런 기회에 작으나마 내 집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 집이라면, 이사를 자주 하거나 주인 눈치 볼 필요도 없을 테니 빚을 내고 무리를 해서라도 내 집을 사기로 하였다.
마침, 시내 변두리에서 아파트를 분양한다기에 그곳에 가 봤다. 이미 큰 것은 분양되었고, 작은 것만 남아 있었다.
몇 호를 선택할까 고민했다. 5층 건물이니 3층이면 가운데 층이라 난방 효과도 좋을 것이고, 6호라면 좌·우로 봐서 중앙이라 306호를 골랐다.
306, 3에다 6을 더하면 9가 된다. 서양인은 7, 중국인은 8을 좋아한다지만, 한국인은 9를 좋아한다고 한다.
한반도 좁은 땅에 태어나 작은 것에서 탈피하고 싶은 잠재의식의 발로에서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한다. 신문 기사나 광고를 봐도, 동양 최대니 세계 제일을 내세울 때가 더러 있다.
9는 기수(基數) 중에서 가장 큰 수이다. 또한, 가보라 하여 끗발로 인정하는 놀이도 있다.
이런 까닭으로 306호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그 아파트는 오르내리는 길의 경사가 심했다. 겨울은 개구쟁이들의 멋진 스키장이 되었고 여름엔 숨을 몰아쉬며 올라야 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시내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약수터가 지척에 있어 목이 절로 시원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7년을 살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고 살림도 하나씩 늘어나니, 책상 하나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다. 이사 가라고 채근하는 주인은 없었지만 아내가 좁다고 불평을 한다. 넓은 집이 필요했다. 남들처럼 아파트 추첨에 기대를 걸어 보았다.
분양 공고가 나올 때마다 신청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여러 번 떨어지니 마음도 상처를 입는가 보다. 이제 신청할 의욕도 사라졌다. 다음부터는 주택 청약 예금에 가입하지 않으면 자격이 제한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를 이용해 볼 셈으로 신청서를 냈다. 추첨은 컴퓨터로 한다고 했다.
추첨 발표일, 게시판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숫자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기는 걸까. 우선 좋은 층부터 찾아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이젠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층이라도 봐야 했다. 그곳이 당첨된 것이다.
3층이다. 하지만 1층이나 2층보다 낫다. 3층이면 운동 삼아 걸어 다닐 수도 있고, 땅의 기운이 작용하니, 고층보다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컴퓨터가 내게 지정해 준 것은 306이란 숫자였다.
306, 이 숫자는 나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당첨된 새 아파트로 이사 와 살면서도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가을 상해에 갔을 때이다. 민족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루쉰공원(魯迅公園)으로 갔다. 루쉰공원은 우리에게 익숙지 못한 이름이지만, 문학가 루쉰과 인연이 있다 하여,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 붙여진 이름이다.
공원 중앙에는 루쉰 선생의 좌상(坐像)이 있고 뒤쪽엔 그의 묘가 있었다. 묘에는 마우쩌둥(毛澤東)의 친필을 음각(陰刻)한 魯迅先生之墓(루쉰선생지묘)란 글씨가 선명하게 돋보인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자취를 찾기 위해 공원을 둘러 봤다. 아무 흔적도 없다. 홍커우공원에 당연히 있어야 할 매헌은 없고, 루쉰만 홀로 잠들어 있을 뿐이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 행사와 전승 축하식이 열린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홍커우공원을 찾는데 한몫을 한 윤봉길 의사다.
이에 장제스(蔣介石)도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했다 한다.
그러나 공원에 루쉰의 집은 있되 윤봉길의 집은 없다. 윤 의사의 넋은 아직도 머물 곳을 찾기 위해 공원을 맴돌고 있으리라.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임시정부 청사가 있다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 가면 내 나라 선열들의 체취가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다.
상하이시 마당로(馬當路), 구식 건물엔 시(市)에서 지정한 관광 명소란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생각보다 초라한 느낌을 준다.
안내양을 따라 들어선 곳은, 방 한 칸 정도의 크기였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내력을 들었다. 듣고 나서야 이곳이 임시정부의 청사가 아님을 알았다. 여기는 중국 정부가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안내문, 사진, 배지 등을 판매하고 관광 수입을 올리는 장소였다. 임정 청사는 바로 뒤편에 있는 연립 주택이었다. 그곳은 개인 소유의 집이라 주인이 외부인들의 잦은 출입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 집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철 대문이 굳게 닫혀 있다. 벌써 성급한 사람들은 문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문 앞으로 가 보았다. 문을 열고 반기는 사람은 없었지만, 닫힌 문에서 낯익은 숫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三Ο六, 그동안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난 숫자를 여기서도 보게 된 것이다.
언젠가 덕산(德山)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과 생가를 찾은 적이 있고, 김구 선생이 머물렀다는 마곡사에서 선생의 영정 앞에 분향한 적도 있다. 그분들의 영(靈)이 306이란 숫자를 나와 인연 지어 준 것일까?
306호는 내가 사는 집이다. 그러나 이곳 三О六 번지는 우리 민족의 집인 것이다. 선열의 넋이 살아 숨 쉬고 민족혼의 심지에 불을 댕겼던 자리가 아니던가. 하지만, 여기에 김구 선생은 없고 낯선 사람만 살고 있을 뿐이다.
남의 집에 세 사는 것도 고달픈 일이거늘 하물며 집 없는 선열들의 설움은 오죽하겠는가.
오늘의 나의 편안함도 사실은 조국을 위해 가신 임들의 피 흘린 결과가 분명할 진데, 독립의 웅지(雄志)를 키웠던 홍커우공원이나 임정 청사에는 선열의 넋이 서릴 자리가 없구나.
허전한 마음에 하늘을 본다. 멀리 떠 있던 구름이 상하이 하늘을 드리우고 있다. 구름아, 너는 아는가. 이국(異國) 나그네의 서글픈 심정을.
* 이글은 1992년 쓴 글이라 현재 상황과 많이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1992. 수필문학.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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