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갈 수 없는 낙화암

여강 선생 2019. 8. 21. 14:49

                                                       갈 수 없는 낙화암
                            

                                                                                                최중호
  제수(祭需)를 싣고 백마강으로 갔다. 정초만 되면 어머니는 제수를 정성껏 마련하여 강에 가서 치성을 드리셨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도와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게 내 처지였다. 전에는 제수를 지게에 지고 다녔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날 때는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고개를 숙인 채 뒤따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나루터가 있던 강마을이다. 나루터는 만남과 이별이 함께하던 곳이다. 장에 간 부모를 기다리던 아이들에겐 즐거웠던 만남의 장소였지만, 자식이나 연인을 보내는 사람들에겐 슬픈 이별의 장소였다.
 그러나 강물은 말없이 흘렀다. 흐름 속에는 마을 사람들의 애환도 섞여 있었건만 세월 따라 도도히 흘렀다.
  강은 자식을 둔 부모들의 마음을 항상 불안하게 만들던 곳이었다. 여름철에는 더욱 그랬다. 강에 가지 마라 그렇게 말을 해도 아이들은 시원한 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부모의 눈을 피해 강으로 갔고 그곳에서 더위를 식혔다.
  초등학교 때에는 친구가 강에서 익사한 일이 있었다. 마침 장날이라서 그의 아버지는 장에 갔었다. 돌아오던 길에 소식을 듣고 아들 주려고 샀던 크레용, 공책들을 강물에 던지며 넋 나간 사람처럼 아들의 이름을 부르던 일.
  중학교 다니던 후배가 헤엄치다 물속에 잠긴 후 시체가 떠오르지 않자 넋을 건지기 위해 강가에서 굿하던 일 등, 이러한 슬픈 사연을 알고 있는 강이지만 평상시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흘러갔다.
  강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도 주었다. 농사를 지을 때는 필요한 물을 공급했고 대부분의 반찬도 해결해 주었다. 강마을 사람들에게 강은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많은 가정에선 화(禍)를 멀리하고 평온을 비는 뜻으로 정초에 용왕제(龍王祭)를 올렸다. 강물에 제(祭)를 지내는 풍습이다.

 

 


  우리 집은 강마을에서 읍내로 이사를 했는데도 어머니는 그 일을 계속하셨다. 자식들이 성장해 강에 가 수영할 일도 없고 쥐꼬리만 한 지식을 핑계로 미신이라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말없이 제수를 머리에 이고 나가시고는 했다. 그것은 내게 있어 갈등이었다. 도와 드리자니 배운 것이 탈이고 무겁게 이고 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지게를 지고 따라갔지만 나오는 건 불평뿐이었다. 어머니가 그 일을 고집하는 데는 강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가 보다.
  민족상잔 6․25는 평화롭던 강마을에도 사상적 대립을 가져왔다. 전쟁 상황에 따라 민주 세력인 우익과 공산 세력인 좌익이 서로 득세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혼란한 상황에선 자신의 처지가 불리하면 애매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했나 보다.
  그 여파가 우리 집까지 밀려와 아버지가 피해를 당하셨다.
  우익 사람들이 득세할 때였다. 옆 동네 살던 우익 사람에게 쌀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한다. 전쟁으로 궁핍한 생활이 계속되자 쌀을 달라 하였다. 그 사람은 쌀 갚을 생각 대신 아버지를 빨갱이라고 모함해 버렸다. 아버지는 사상적 대립이 심할 때도 가족의 생계만을 위해 광산에만 열심히 다니셨다.
  그러나 아버지에겐 사건의 진상을 밝힐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날 밤, 경찰서에 후퇴 명령이 전달된 것이다.
  서울에서 국군이 후퇴할 때, 서대문 형무소에 남아 있던 좌익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지 못한 경찰, 군인들의 가족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한다. 그 사건이 난 뒤 정부에서는 열성적인 좌익 사람들을 처벌하였고,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추가로 예비검속(豫備檢束)을 실시하였다. 이때 아버지가 경찰서에 끌려오신 것이다. 후퇴 명령에는 경찰서에 갇혀 있던 사람들까지 처단하라는 내용이 있었던가 보다. 서울에서 내려온 헌병들에 의해 철창문이 열렸다. 이어 두 명씩 포승으로 손목을 묶은 다음 이십여 명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잠시 후 부소산 쪽에서 총소리가 났고 빈 트럭은 다시 나타났다. 경찰서에 남아 있던 사람들 사이엔 어느새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감돌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낯모르는 사람과 함께 손목이 묶인 채 트럭에 올랐다. 차는 부소산으로 달렸다. 휘영청 밝은 달도 그날 밤 낙화암에선 을씨년스럽게 차가웠다.
  낙화암 난간에 사람들을 차례로 세웠다. 앞에 선 사람부터 총알을 맞고 떨어졌다. 다음은 아버지 차례였다. 총을 쏘려는 순간 두 사람은 하늘에 목숨을 걸고 강으로 뛰어내렸다. 아버지는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묶였던 사람과 의사가 통해 포승을 풀었던 것이다.
  강물에 비친 달은 유난히 밝았다. 조용히 흐르던 백마강에 비늘 치는 소리가 나자 위에서 총을 쏘아 댔다. 물결은 다시 잔잔해졌다.
  살아야겠다는 집념은 감각도 무디게 하는가, 아버지는 총을 맞은 것도 몰랐다. 헤엄을 치려 할 때 한쪽 팔이 축 늘어지면서 감각이 없어 비로소 총 맞은 것을 알았다.
  손가락을 이빨로 물었다. 남은 한쪽 팔로 헤엄쳐 나가기 시작할 때, 다시 총소리가 났다. 이번엔 다리에 맞았다. 헤엄치는 걸 포기하고 물살 따라 떠내려가다 어느 백사장에 닿았다.
  팔과 다리에선 계속 피가 흘렀으나, 그들이 쫓아올 것만 같았다. 다리를 절며 한 손으로 핏자국을 모래로 덮으며 나갔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어느 집 헛간에 몸을 숨길 수가 있었다 한다.
  그 후, 그 동네에 살던 학교 동창의 도움을 받아,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국군은 이미 후퇴한 뒤라 좌익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충동질했다. ‘죄없이 총까지 맞아 얼마나 억울하냐, 영웅 대우를 할 테니 같이 일을 하자.’고 하였다. 아버지는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상처 치료만 하셨다. 국군이 북진할 때는, 아버지를 잡아갔던 경찰이 찾아와 잘못을 사죄했다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로 인해, 그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를 모함했던 사람이나 잡아갔던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셨다. 대신 강에 가 용왕님께 비셨다.
  이러한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헤아린다면, 나는 배웠다는 핑계만 댈 수 있겠는가. 불평 없이 지게를 지고 어머니 뒤를 따라 다녔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강물을 향해 빌고 계신다. 비록 돌아와 삼 년을 더 사셨지만, 남편을 구해 주셨고 그로 인해 아들이 태어났음을 감사드린다고. 유람선 한 척이 백마강을 거슬러 낙화암 쪽으로 간다. 빤히 보이지만 갈 수 없는 낙화암. 그곳을 스쳐 온 강물도 마음을 아는 듯, 유람선 자국이 물이랑 되어 발치에 와 머문다.

                                                 

                                                                                      (1993. 수필문학. 5월호)

 

 

 

 

'최중호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6호  (0) 2019.10.21
기벌포 사극(史劇) 무대  (0) 2019.09.29
유허(遺墟)에 핀 민들레  (0) 2019.07.29
평생을 그리워하던 파진산  (0) 2019.05.26
지척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작은 외숙  (0) 2019.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