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허(遺墟)에 핀 민들레
최중호
토요일이면 박팽년 선생의 유허(遺墟)*로 간다. 그곳을 청소하면서, 선생의 체취를 보듬기 위해서다. 유허엔 선생이 살았던 옛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얼마 전, 그곳에 갔을 때 선생의 유허비가 너무 애처로워 다시 찾기로 한 것이다.
옛날엔 이곳을 흥룡촌 왕죽구(興龍村王竹丘)라 했으나, 지금은 가양동 더퍼리라 부른다.
선생은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어린 단종의 자리를 빼앗은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다시 추대하려 했던 분이다. 하나 불행하게도 단종 복위 사건이 실패로 끝나 혹독한 고문 끝에 숨을 거둔 분이다. 선생은 세조의 회유와 높은 관직도 마다하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불사이군(不事二君), 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투철한 선비 정신이다. 후일, 세조도 선생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만세충신(萬世忠臣)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백여 평 되는 잔디밭 한 곳에 세워진 비각, 그 지붕도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 주듯 잡초 자란 흔적이 무성하다.
비각 안에는 높이 2m 정도의 비(碑)가 힘없는 사람처럼 쓰러지려 한다. 자세히 보니 비는 상처투성이였다. 거의 모든 면에 금이 가 있고 그 틈새를 시멘트로 발라 놓은 것이다. 비 위에 얹어 놓은 가첨석도 상처는 마찬가지였다. 금이 간데다 색깔마저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선생의 유허비가 왜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한단 말인가.
세조는 선생을 모진 고문과 극형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팔과 다리가 찢기고, 머리까지 잘리는 형을 당한 것이다. 그때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머리엔 선혈이 낭자했으리라. 금이 간 비신(碑身)이 상처투성이인 선생의 몸이라면,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가첨석은 선혈로 젖은 머리가 아니겠는가.
유허비는 선생의 모습이었다. 처형당할 때의 참혹한 모습으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유허비는, 선생이 살던 옛터에 남겨진 선생의 모습(遺身)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달픈 마음으로 비문을 본다. ‘平陽朴先生遺墟碑(평양박선생유허비)’란 송준길의 글씨가 힘차고 오달지다. 송준길은 글자 획 하나하나에도, 선생의 기개를 나타내려 한 것 같다. 죽으면서도 끝까지 단종을 섬기겠다는 선생의 굳은 지조를 보여 주는 듯싶었다.
비각은 비를 세운 후 4년 뒤에 세웠으며, 그 이름을 세조의 ‘만세 충신’이란 말을 인용해 장절정(壯節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송시열도 선생을 흠모했음인지, 비와 비각을 세우는데 참여했던 것 같다. 비문과 장절정기(壯節亭記)도 그가 지었다. 그는 장절정기에서, ‘선생의 옛터가 잊혀져 가는 것을 염려해 비를 세우고 정자를 복원하면, 선생의 영(靈)이 와서 의지하시고, 지나는 길손도 아쉬워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비각을 세울 때만 해도, 주위엔 물과 돌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이 거닐며 자연을 감상하던 연못에 있던 정자와 바위도 보이지 않는다. 반듯하게 들어선 주택들뿐이다. 오가는 사람은 있어도 선생의 유허를 돌아보는 사람은 없다. 만고 충신의 유허가 애틋하게 쓸쓸하다.
비를 맞으며, 비각 둘레에 흩어진 유리 조각과 휴지를 줍는다.
공원은 아직 이른 봄이라, 엷은 갈색 잔디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파란 종이와 노란 종이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주우려고 갔으나, 그건 종이가 아니라 노란 민들레였다. 톱날처럼 생긴 파란 잎이 그대로 살아 있는 걸 보니, 민들레는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모양이다. 여느 풀보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것 같다. 민들레는 밟히고 짓이겨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유허에 핀 민들레, 민들레는 어쩌면 선생의 후손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들레는 뿌리를 잘라 심어도, 뿌리를 며칠 말렸다가 심어도 싹이 돋는다. 선생의 후손도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
민들레의 잎이 땅바닥에 착 달라붙어 모진 추위를 이겨내듯, 선생의 후손은 어머니 배속에서 살아 있었다. 그가 선생에게는 유복손(遺腹孫)이요, 사육신의 후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인 것이다.
단종 복위사건으로 선생의 가족이 화를 당할 때, 둘째 며느리 이 씨는 임신한 몸으로 대구 관아의 노비가 되었다. 이 씨는 그곳에서 아들 일산(一珊)을 낳았으나 걱정이었다. 역적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면 연좌라 하여 죽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남몰래 여자로 변장시켜 근처에 있는 친정에서 기르게 하였다. 기르면서도 남에게 들킬까 봐 가슴을 조였다.
17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일산의 이모부가 대구 감사가 되어 내려왔다. 그는 일산을 보자 눈물을 흘렸다. 숨어서 자란 일산이 성장한 것은 기뻤으나, 처지가 안타까워 흘린 눈물이다. 그는 일산에게, “이제 더는 숨어 살기도 어려울 것 같으니, 자수할 것”을 권유했다.
그 후 일산은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성종께 자수한 후 죄를 면했다고 한다.
민들레는 꽃이 피고 나면 꽃대가 자라 솜털을 지닌 씨가 된다. 수구초심(首丘初心), 민들레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는 걸까. 홀씨가 바람에 날려, 선생의 유허 부근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선생의 17대 후손이 대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민들레는 한방에서 포공영(蒲公英)이라 하며 약재로 쓰이고, 옛글에는 포공(蒲公)이라 하여 서당 훈장을 상징하기도 한다. 선생의 후손도 한의원을 경영하며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유허에 핀 민들레, 그 홀씨는 바람이 불면 어디로 갈 것인가.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안영리 숭절사(崇節祠)*와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으로 갈 것만 같다.
노란 민들레는 상처 난 선생의 유허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 유허(遺墟) : 옛사람의 자취가 있는 곳.
* 숭절사(崇節祠) : 대전 서구 안영동에 있는 사당으로 박팽년 선생과 박심문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숙모전(肅慕殿) : 계룡산 동학사 옆에 있는 사당으로 신라 시대 박제상부터, 고려 시대, 조선 시대 후기까지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곳에 박팽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93. 한국수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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