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그리며
최중호
외로움이 밀리면 고향으로 가 어머니를 찾아뵌다. 그래도 외로울 때는 고향집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궁남지(宮南池)로 간다. 궁남지는 옛날 백제 왕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그곳은 주위가 평야 지대라 여름엔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고, 겨울엔 수양버들을 감싸 안은 흰 눈이 고와 그곳을 찾는다.
이제 고향에 가도 늙으신 어머니를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이외에는 친구들과 만나는 일이 드물어서 마음이 더 한가해진다. 이럴 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마음이 나를 궁남지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막연하나마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일까? 그 옛날 누군가 이곳에서 사랑의 씨앗이라도 싹 틔웠단 말인가? 바람이 분다. 차가운 겨울바람이다. 이럴 땐 차가운 바람을 막아 줄 따뜻한 가슴이 그리워진다. 바람이 잠자고 있는 앙상한 버드나무를 흔들어 깨운다. 그리고는 나무에게 ‘선화공주를 아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무는 가지를 좌우로 흔들며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서동(薯童) 왕자는 아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나무는 '모른다'며 가지를 좌우로 흔든다.
이때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치 한 마리가 나무와 나무 사이로 날아다니며 무어라 속삭여 댄다. 아마 버드나무에게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양이다.
궁남지엔 연못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방장산(方丈山)의 의미를 담았음인지, 작은 섬과 정자(亭子)가 있고 물 위엔 구름다리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정경은 살아 움직이는 한 폭의 산수화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젊은 연인들 사이에선, 연못 주변을 거닐며 사랑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로 소문이 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 이곳은 옛날부터 사랑을 나누기에 적합했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스름한 달밤, 궁궐 남쪽에 사는 한 여인이 연민의 정에 잠을 못 이뤄 연못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이때 갑자기 연못에서 물결이 일더니 용이 나타나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 후 그 여인은 태기를 느껴 열 달 뒤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는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나, 어려서 마(薯)를 캐서 팔아 생활을 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맛둥(서동:薯童)이라 불렀다 한다.
그 무렵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는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 소문을 들은 서동은 머리를 깎고 경주로 가서 중의 행색을 하고 마를 가져와 경주 근방의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서동과 정을 통하고, 밤에 몰래 나와 서동을 안고는 (궁궐에 돌아) 간다.’
이 노래가 장안에 퍼지자, 신하들은 공주의 잘못을 규탄하였고, 왕은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은 공주가 귀양 가는 길에 나와 그를 데리고 백제 땅으로 왔다고 한다.
이곳 궁남지에 탄생 설화를 남긴 서동, 그는 이곳에서 선화공주를 그리워하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신라로 떠났다.
하지만 나는 누구를 그리워하기에 이곳에 와 있는가?
아무도 오지 않는 궁남지엔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나도 그리워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떠나야겠다. 누구를 만나러 갈까?
(2002. 수필문학.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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