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최중호
초승달은 어린 계집애이다. 엷게 깨문 입술은 차마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계집애이다. 즐거울 땐 환하게 웃지만 슬플 때는 울음을 참지 못해 큰 소리로 우는 계집애이다. 수줍어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진 못하지만, 깊이 감춰 둔 마음은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천진난만한 계집애인 것이다.
초승달은 음력으로 그믐이 지나 초 삼 일경에 뜬다. 모양이 안쪽으로 움푹 패어 있어 아기를 재우는 요람과 같아, 아기 천사가 평화로이 잠을 자고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너무 밝으면 잠들지 못할까 봐 그 빛도 희미하다. 초승달은 날이 갈수록 모양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해, 음력 칠일이나 팔일 경이면 안쪽 곡선이 점점 부풀어 올라 상현(上弦)달이 된다. 둥근 쪽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해서 상현달이라 부른다. 초승달의 야위었던 부분이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면 어린 계집애는 조금씩 소녀티를 내기 시작한다. 소녀는 살찐 몸매도 아니요, 그렇다고 얌체처럼 깡마른 몸매도 아니다.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혔지만 야윈 얼굴은 수다를 잘 떨 것 같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이 많아 좀처럼 말이 없는 꿈 많은 사춘기 소녀인 것이다.
초승달은 눈치가 빠른 소녀가 아니다. 그렇다고 어리석은 소녀도 아니다. 이해타산에 밝아 남에게 손해를 끼칠 것 같지만, 마음이 여려 자신이 먼저 손해를 볼 줄 아는 그런 소녀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거뜬히 해치우는 조금은 억센 소녀이기도 하다.
초승달은 둥근 원의 변두리 부분에 엷게 붙어서 희미한 빛을 낸다. 그 빛이 보름달처럼 밝지는 않지만, 밤길을 걷는 나그네가 불편해하지 않을 만큼 은빛 가루를 땅 위에 뿌려 준다.
초승달을 자세히 보면 보름달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날이 가면 보름달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초승달은 언제나 여유가 있다. 보름이 되면 밝게 비출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밝은 미소를 띠며 대지를 내려다본다.
초승달은 한낮 동쪽 하늘에 살며시 얼굴을 내밀기 때문에 초승달을 본 사람이 별로 없다. 초승달은 밝은 태양이 외출할 때 뒤따라 나서기 때문이다. 초승달은 몸도 야윈 데다 빛 또한 흐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 ‘초승달은 잰* 며느리가 본다.’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초승달은 현철한 며느리이다. 자신이 할 일은 영리한 머리로 깔끔하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유행하는 옷이나 명품 가방보다는 실속 있게 살아가는 알뜰한 며느리인 것이다. 직장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잠깐 시장에 들른 후, 집으로 돌아가는 속이 꽉 찬 워킹맘이다.
초승달은 비록 몸매는 가냘프고 빛 또한 희미하지만 보름달보다 더 여유가 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마음씨 곱고 오지랖 넓은 종갓집 맏며느리 같지만, 젊었을 때 일을 많이 해서 몸이 불편한 안방마님의 얼굴이다. 그의 얼굴에선 점점 밝은 빛을 잃어 가는 하현(下弦)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현달은 갱년기가 지나 몸이 허약해진 육십 대 여인처럼 보인다. 하현달이 점점 어둠에 묻혀 날이 지나고 보면 하늘엔 그믐달이 뜬다.
그믐달은 그녀가 나이가 들어 허리는 굽고, 걸음걸이마저 어설픈 팔십 대 할머니의 모습이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 바깥출입이 적고 집 안에만 있는 시간이 많다. 그믐달은 초승달과 같이 빛은 흐리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소망을 빌 수 있는 다음 달에 뜨는 초승달이 있기 때문이다.
한 달이 초승달로 시작해서 그믐달로 되돌아가듯, 우리네 인생도 윤회라 해서 돌고 도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지키던 방에도 어느덧 세월이 지나고 보면,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다.
* 잰 : 행동이 빠르고 활발한 것을 말함.
(2022. 수필과비평.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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