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지 노량해역

여강 선생 2023. 2. 26. 19:32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지 노량해역                                                                   

                                                                                최중호
  임진왜란, 그 지루했던 7년 전쟁의 최후 격전지 노량해역으로 갔다. 먼저 관음포로 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몰 유허(遺墟)가 있는 이락산으로 갔다. 이락사(李落祠)로 가는 길가에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장군의 어록비(語錄碑)가 있다. 비에는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라고 했던, 장군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장군의 순국 400주년을 맞아 유삼남 해군참모총장이, 장군의 유언을 글로 써서 어록비로 세운 것이다.  
  이락사 가는 길에는 하늘을 향해 뻗은 소나무가 길 양옆에서 방문객을 반긴다. 소나무 숲길을 얼마 가지 않아 담장으로 둘려 있는 건물이 보인다. 이락사다. 들어가는 문 위에 이락사라 새겨진 편액이 있고, 문 안에 ‘이충무공유허비각(李忠武公遺墟碑閣)이’ 있다. 비각에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는 뜻의 ‘대성운해(大星隕海)’란 편액이 걸려있다. 이락사는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후, 유해가 맨 처음 올려졌던 곳이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던 관음포 앞바다가 훤히 보인다. 그의 자취가 서려있는 이곳에 유허비를 세워놓은 것이다.  

                               이락사                              이락사 안에 있는 장군의 유허비각(대성운해)
  이락사를 지나 이락산 끝자락에 있는 첨망대에 올랐다. 멀리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이 보이고, 가까이로는 바닷길 양옆에 나지막한 산이 보인다. 여기 보이는 관음포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인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그 옛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격랑의 바다를 그려보았다.

                         첨망대                                  첨망대에서 바라본 장군이 순국하신 노량해역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본국으로 철수하기 위해 순천 등지로 집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장군은 철수하는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명나라 제독 진린과 함께, 고금도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앞바다에 도착한다. 이때 순천 왜교성에 고립되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본국으로 퇴각하기 위해, 사천에 있던 시마즈(島津義弘)와 남해에 있던 소오(宗調信)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왜군은 조․명 연합군을 공격하면서 퇴각하려 하였다. 
  1598년 11월 18일, 왜선 500여 척이 노량해역과 순천 왜교 등지에 집결해서 공격을 시작한다. 이 해전에서 조․명 연합군이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자 왜선 50여 척은 관음포 방면으로 달아났다. 11월 19일 아침, 장군은 도주하는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혈전하던 중, 왜군이 쏜 탄환을 맞고 선상에서 쓰러진다. 이에 군사들이 부축하여 배 안으로 들어가니, 장군은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하고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목숨 바쳐 승전으로 이끌었고,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다. 
  첨망대에서 바라본 관음포 앞바다는 잔잔했다. 밝은 햇빛이 푸른 바다를 비추니 은빛 물결이 눈부시게 빛난다. 장군이 이룩한 크나큰 공적을 물결도 축복해주는 것 같다. 
  관음포에서 나와 장군의 또 다른 유적이 있는 남해 충렬사로 간다. 이 길은 400여 년 전 장군이 관음포에서 순국한 후, 운구 행렬이 지나갔던 그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길이다. 관음포에서부터 펼쳐지는 해안 절경을 보며 5.6km 정도를 가면 남해 충렬사가 나온다. 

남해충렬사


  충렬사는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외삼문에 충렬사란 편액이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 내삼문을 지나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했다’는 뜻의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 쓰여 있는 비각이 있다. 비각에는 충렬사의 유래에 대하여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쓴 비가 세워져 있다. 
  비각 뒤로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렬사가 있다. 중앙에 커다란 위패가 있고, 그 위에 관복을 입은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빛이 바랜 영정을 보며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께 인사를 올린 후 사당 밖으로 나왔다. 사당의 양옆에 두 기의 비(碑)가 세워져 있다. 왼쪽은 충민공비(忠愍公碑)요, 오른쪽은 충무공비(忠武公碑)다. 충무공비는 장군의 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충민공비는 누구의 비란 말인가?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선조 31년(1588년)에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우의정을 추증하였고,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633년 남해 현령 이정건이 사우 앞에 충민공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장군에게 1643년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기 전에는 충민공이라 불렀던가 보다.

                                  충민공비                                                           충무공비
  사당 뒤쪽으로 문이 하나 있다. 그 문으로 나가면 둥근 봉분의 묘가 있다. 장군의 가묘(假墓)다. 장군이 관음포에서 순국한 후, 그 유해를 이곳으로 모셔 와 얼마 동안 묻혀있던 곳이다. 그 후 장군의 유해는 수군의 본영이 있던 고금도에 안치되었다가, 현재의 묘소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운구되었다고 한다. 

충무공 가묘


 장군의 묘를 바라본다. 이곳에 장군의 유해는 없지만, 사당에 모셔져 있는 영정이 장군의 유해를 대신하고 있다. 남해 충렬사는 나라를 위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바쳐 싸웠던 노량해역이 보이는 곳이요, 나라를 내 몸보다 더 사랑했던 장군의 넋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2018. 수필문학. 3월호)


                
    

'최중호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도 영웅 김재현  (2) 2023.05.21
당항포에서 만난 여인  (0) 2023.03.25
장군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여수)  (0) 2023.01.15
동북아의 절세 영웅  (0) 2022.12.16
매월당의 자화상  (0) 2022.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