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매월당의 자화상

여강 선생 2022. 11. 27. 13:23

                                                                  매월당의 자화상

                                                                                                최중호
  항상 초와 향을 가지고 다닌다. 지나는 길에 억울한 생을 살다 가신 선열의 묘소가 있으면, 찾아가 분향(焚香)하기 위해 서다.
  얼마 전,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무량사(無量寺)에 있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선생의 부도(浮屠)를 찾은 적이 있다.
  부도란, 득도한 선사(禪師)의 유골을 안치한 것으로 대부분 범종(梵鍾) 모양인데, 선생의 것은 달랐다. 팔각으로 된 탑 모양이었다. 평소에 원만치 못한 그의 성격을 반영이라도 한 듯 모가 져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부도


  특이하구나 생각하며 경내를 돌아본다. 대웅전을 지나 산신각 가는 길에 안내문이 있어 읽어보니, 선생의 자화상이 산신각 안에 있다는 것이다. 무척 반가웠다.
  언젠가 김시습 선생의 전기를 읽다가 그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궁금해하던 터였다.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간다. 굽이진 길을 조금 걸으니, 다 삭은 통나무 다리가 나온다. 발을 딛기만 하면 곧 부러질 것 같아 조심스레 건너가니, 앞에 산신각이 보인다. 산신각은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는 후미진 곳에 있었다. 산신각 안은 컴컴해 잘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구석에 선생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곳에 촛불을 밝히고 분향하니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처음엔 어른을 찾아와 무례하게 굴었으니 잘 보이지 않았고, 인사를 드린 후에야 선생은 모습을 드러내는 듯싶었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선생의 표정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성현이나 학자들의 영정은 온화하고 인자해 보였는데, 선생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꽉 다문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알았다 하여 신동으로 소문났었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했으니 그의 재주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 소문을 세종도 듣고 칭찬하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학문에 힘써 나갔다. 학덕을 쌓아 세상에 유익하게 쓰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가 하늘같이 믿었던 세종을 승하케 했으니, 그의 학문이 필요치 않았단 말인가. 단종의 폐위와 더불어 세조의 등극은 시습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그는 자신이 이룬 학문과 지성을 초야에 버리고, 승려가 되어 법호(法號)를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시습은 시절을 만나지 못한 탄식과 임금을 향한 원망으로 살아갔다. 고뇌를 잊기 위해 하늘을 보며 웃고 글을 써 흐르는 물에 띄워 보냈다. 때로는 나무꾼과 이야기하고, 혼자 시를 지어 읊어 봐도,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다. 방랑과 기행으로 마음을 달랬건만 소용이 없었다. 한 번 가슴에 사무친 생각은 또 다른 기행을 불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종이 위에 그렸다. 이 그림이 바로 양미간을 찌푸린 자화상이다.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자화상


  잔뜩 찌푸린 눈매는 세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에 대한 증오인 것 같고, 눈가에 번지는 우수는 단종을 향한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듯싶다. 굳게 다문 입술은 일편단심 굳은 의지를 보여 준다. 그 속에는 오랜 세월의 스승이기에 넉넉했다던, 학문을 마음껏 펴지 못한 아쉬움도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총명했다. 빛나는 영예(英銳)를 갖추고 현실을 직시했던 눈이다. 이치에 밝아 막힘이 없었다 하니, 그의 고매한 정신세계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후일, 율곡은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 스스로 수습할 수 없었으며, 의(義)를 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그 뜻은 일월과 빛을 겨루었다’고 시습을 칭송하였다.
  가히 그의 높은 학문적 경지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산신각을 나오려니 미련이 남는다. 무엇인가 잃고 가는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 선생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 표정이 나를 사로잡고, 그곳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
  선생이 보여 준 표정은 한(恨), 바로 그것이었다. 원통할 때 품는 마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한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선생의 표정에서 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책상 앞엔 사진 하나가 걸려 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밝은 표정을 지어 보지만, 인화되어 나온 얼굴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4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결과, 어머니 가슴엔 어린 자식을 키우느라 많은 한이 맺혔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당신의 슬픔보다 어린 자식 4남매가 안타까웠던지, 입술을 깨물며 들로 나가시곤 했다. 이때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아버지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던 친구들이었다. 나에겐 왼손을 잡아 줄 어머니는 있으나, 오른손을 잡아 줄 아버지가 없었다. 그나마 왼손을 잡아 주던 어머니마저 생활에 쫓겨 일터로 가셨으니 나의 손은 허전하였다. 내 손은 양친의 따뜻한 손길을 원했건만 사랑 대신 쥐어진 것은 차가운 호미뿐이었다.
  나는 아버지 사진이나 유품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어머니는 강하게 사셨다. 그런 어머니가 처음 눈물을 보인 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날이다. 아버지와 함께 기쁨을 나누지 못한 설움이 빚어낸 눈물이었다.
  가슴에 얼룩진 한은 세월의 빛에 색깔은 바랬지만,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를 방황케 했다.
  외로움이 밀리면 나는 아버지 산소로 갔다. 그래도 허전한 가슴이 채워지지 않을 땐 훌륭한 선열의 묘소를 찾았다. 그곳에 분향재배한 후 술잔을 올린다. 그러고 나서 가슴에 맺힌 한을 이야기하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화 요법(淨化療法)이라 할까, 아니면 착각일까.
  사람은 때로 착각하며 살기도 한다. 만약, 내가 살아 있는 이름 높은 사람을 찾아갔다 한들 반겨 줄 것인가.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영정은 임금도 정승도 나를 반기니, 내 어찌 그 일을 계속하지 않으리오.
  어느새 발길은 김시습 선생의 부도가 있는 곳에 머문다.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뤘다. 향을 태운 연기는 지상의 뜻을 하늘에 전하려 높이 솟아오른다. 그의 충절을 알리려는 것일까.
  지금도 그는 이 나라에 많은 인재가 태어나 자신이 못다 이룬 학문과 뜻을 마음껏 펼쳐 주길 하늘에 기원하고 있는 것 같다.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장부의 한은 한 시대의 뿌리가 되어, 후세까지 짙은 향기를 전하며 부도로 서 있는 것이다.
  다음은 영월로 가야겠다. 매월당 선생을 대신하여 단종께 알현(謁見)하고, 일주향(一柱香)을 올리리라.
                                           
                                                          (1991. 수필문학.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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