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의 절세 영웅
최중호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말살하고, 선열들의 독립 의지를 짓밟았던 뤼순에 있는 일본관동법원으로 갔다. 법원은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숨긴 채 옛날 그 자리에 있었다. 옛 법원은 세월의 격동기를 지나면서 뤼순일본관동법원 전시관과 병원으로 나뉘어 있다.
![]() |
![]() |
뤼순 일본관동법원 안중근 의사 추모실
일본관동법원 전시관은 한국의 뤼순순국선열기념재단에서 건물의 일부를 복원해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전시관에는 영웅 열사 전시실과 안중근 의사 추모실 등 모두 14개의 전시실이 있다.
영웅 열사 전시실로 갔다. 그곳에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 그리고 중국의 항일 투쟁 열사들의 사진과 법정 관련 기사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웅 열사 전시실을 관람한 후, 옆에 있는 안중근 의사 추모실로 갔다. 커튼이 드리워진 안쪽에 안 의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안 의사는 늠름한 모습으로 흰 한복을 입고 앉아 계셨다. 흰 한복은 당시 조선 백성을 상징하는 옷이었다.
안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 판결 소식을 듣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면서 눈앞이 캄캄했다. 그녀는 청천 벽력같은 아들의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뛰는 가슴을 마음속으로 쓸어내리며 흰색 옷감 한 벌을 구해왔다. 아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조선의 얼이 깃든 흰 한복을 입혀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벅차오르는 울분을 참아가며 아들의 한복을 짓기 시작했다. 바늘로 한 땀 한 땀 하얀 천을 떠 나갈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머금었던 눈물을 삼켜도 봤지만 떨어지는 눈물은 하얀 천 위를 적시고 또 적시었다. 바늘이 천의 아래위를 뚫고 지날 때마다 하얀 천 위에 떨어진 눈물 자국이 조선의 얼을 하나둘씩 새겨나가고 있었다. 아들이 마지막으로 입고 갈 한복을 그렇게 마련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일본인에게 대한(大韓) 남아의 기개를 당당하게 보여주길 원했던 것 같다. 어머니의 눈물로 지어진 한복은 안 의사의 동생들 편에 안 의사에게 전달되었다.
영정 앞에는 많은 꽃이 놓여 있고, 양옆에 화환이 세워져 있다. 안 의사를 존경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곳에 와 머물고 있는 것이다. 영정을 중심으로 추모실 양쪽 벽엔 안 의사가 남긴 글씨들이 전시되어 있다.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자신의 심경(心境)을 글로 쓴 것이다.
영정 앞에 고개 숙여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전시관을 마련해준 뤼순순국선열기념재단과 중국다롄한국인(상)회 사람들께 고맙다고 생각을 했다.
고등법원 대법정으로 갔다. 여기서 안 의사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마지막 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방청석에는 나무로 된 긴 의자가 여러 줄 놓여 있다. 100여 명 정도의 방청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방청석 앞쪽 높은 곳에 공소인(항소인), 재판장, 통역관, 서기원(기록원)의 자리가 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 의사는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 |
![]() |
하얼빈 역 전경 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에 있는 안 의사 전신상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통치 구역이었다. 해서 안 의사의 사건은 러시아 정부에서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의 경비 책임을 물어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사건은 국제적으로 중대한 사건임을 강조하며, 일본이 관할하는 뤼순일본관동법원에서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이 원하는 재판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 연유로 안 의사의 사건은 뤼순일본관동법원에서 처리하게 된 것이다.
하얼빈 의거 후,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된 안 의사는 그날 밤 일본군에게 넘겨져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11월 1일, 하얼빈을 출발한 안 의사와 그 동지들은 일본과 러시아 헌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3일 뤼순감옥으로 갔다. 뤼순의 일본관동법원은 안 의사에 대해 6차에 걸쳐 공판을 했다. 이때 조선과 영국, 러시아 등의 변호사들이 안 의사를 위해 무료 변호를 신청했지만, 일본관동법원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 정부에서 선임한 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겼다.
11월 6일, 안 의사는 서면으로 ‘한국인 안응칠 소회’,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 조’를 제출했다.
법정에서 안 의사는 “지금 대한의 국토에서는 한·일간에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 이번 거사도 대한독립 전쟁의 일부분이다.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고, 대한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하여 행한 것이다. 나의 공판은 국제공법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얼빈 의거의 정당성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침략하고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를 열거하였다. 그러자 재판관은 안중근의 발언을 중지시키고 휴정을 선포한 후, 방청객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비공개로 재판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안 의사의 진술을 방해하였다.
1910년 2월 14일. 6차 공판에서 안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일본 재판관에게 “일본에는 사형보다 더한 형벌은 없느냐?”며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1910년 2월 17일. 안 의사는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마지막으로 “나는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을 결심하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상소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안 의사의 그런 의지와 당당한 모습 뒤에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있었다.
사형 선고 소식을 들은 조 여사는 안 의사가 마지막으로 입고 떠날 흰 한복을 손수 지은 후,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여장부의 결의가 담긴 짧은 편지였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아랫글 생략)
그는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항소하지 않고 사형 선고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안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오로지 나라를 위해 한목숨 바칠 것을 당부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여장부의 기개를 그녀의 편지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안 의사는 사형 판결을 받은 후, 40일이 지난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 |
![]() |
![]() |
뤼순감옥 전경 안 의사가 갇혀있던 감방 감방 내부
안 의사가 순국한 후, 법정에서 안 의사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더 그래픽(The Graphic) 지의 찰스 머리모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전시관을 나오면서 건물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다. 이곳 법정에 섰던 우리의 항일 투사들은, 법정이나 사형장에서도 일제의 어떠한 강압도 두려워하지 않고 위풍당당하였다. 그들은 일제에 맞서 우리 민족의 거룩한 기상과 절개를 널리 만천하에 떨쳤던 것이다.
그중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하게 맞섰던 자랑스러운 대한의 남아요, 동북아의 절세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21. 수필문학. 1‧2월호)
'최중호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지 노량해역 (0) | 2023.02.26 |
|---|---|
| 장군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여수) (0) | 2023.01.15 |
| 매월당의 자화상 (0) | 2022.11.27 |
| 귀신잡는 해병 (0) | 2022.11.26 |
| 운이 좋은 그녀 (0) | 2022.08.1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