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에 울린 총소리
최중호
6월이면 생각나는 분이 있다. 일제강점기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해방된 후에는 통일된 조국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이다.
아내의 진료 차 강북삼성병원엘 몇 차례 다녔다. 병원 구조가 복잡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진료를 했다. 오늘도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A동과 B동 사이에 건물이 하나 있다. 병원 부속 건물이려니 생각하고 걸어가는데 작은 안내판에 경교장(京橋莊)이라 쓰여 있다. ‘병원 안에 경교장이라니?’ 의아히 생각하며 안내판을 들여다보았다. 이곳이 해방 후, 김구 선생께서 기거하셨던 바로 그 경교장이었다. 여러 번 이 앞을 지나갔지만 보지 못하고 오늘에서야 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경교장. 반가운 마음에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안에 김구 선생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관람 순서에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지하 1층에는 3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제1전시실은 ‘경교장의 역사’, 제2전시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에 대한 설명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경교장은 1938년 최창학이 죽첨장(竹添莊)이란 이름으로 건립했는데, 해방 후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그들의 활용 공간으로 제공되었다.”고 한다.
제3전시실로 갔다. 그곳에 선생의 유물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먼저 선생의 시계가 보였다. 이 시계는 본래 윤봉길 의사의 것이었다. 윤 의사가 홍커우공원의 거사를 위해 떠나기 전에, 자신은 이제 새 시계가 필요 없다며 선생의 헌 시계와 바꾼 것이다. 시계를 보고 당시 윤 의사의 결의에 찬 모습을 그려보며 고개를 숙였다.

시계가 전시된 옆 벽면에 피 묻은 선생의 저고리가 펼쳐 걸려 있다. 그 아래 피 묻은 바지도 있다. 피가 낭자한 옷 속엔 그동안 힘들게 살아오신 선생의 인생 역정(歷程)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 같다.
선생은 1876년 창수(昌洙)란 이름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학문을 배워 과거에 응시하려 했으나 부정부패가 심한 것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 조스께(土田讓亮)를 죽였다. 그 후, 집에 숨어 있던 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을 거쳐, 인천 감리영으로 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特赦)로 사형집행 정지명령이 내려져 사형은 면했으나,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반대로 석방되지 못했다. 선생은 감옥에서 탈출 공주 마곡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다.
그 후, 안악사건과 신간회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감옥에서 김구의 구(龜) 자를 구(九)로 바꾸고, 호를 평민이란 뜻으로 백범(白凡)이라 지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사를 도쿄로 보내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고,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 기념행사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여러 일본인 고위층을 사망 또는 부상케 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인에겐 조선 청년의 기개를 널리 떨쳤고, 중국인에겐 적극적인 용기로 항일투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중국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셨다.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바로 임시정부를 이끌고 귀국하려 했으나 귀국하지 못했다. 미군이 임시정부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자, 개인 자격으로 임정 요인들과 함께 11월 23일 귀국하여, 경교장에 머물게 되었다. 선생은 경교장에서 통일된 조국을 위해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서 1948년 4월, 김규식 박사와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에 가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자 회담을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해 미, 소 양국의 신탁통치 하에 남한에선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북한에선 9월 9일 김일성 정권이 각각 들어섰다. 선생은 반탁운동과 통일된 조국 정책이 효력을 거두지 못하게 되자 체념한 후, 경교장에서 중국 고전과 서예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이 원했던 정책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겐 항상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 육군 소위이며 주한미군 방첩대(CIC) 요원인 안두희가 찾아왔다. 그는 선생을 만나기 위해 2층에 있는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 후, 선생의 집무실에서 4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선생은 그렇게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해방된 후에는 통일된 조국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오신 선생이다.

비통한 마음으로 선생의 피 묻은 저고리를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선생의 저고리가 마치 나비가 날개를 펴고 앉아있는 모양으로 보인다. 벽에 앉아있던 나비가 어느덧 훨얼 훨 춤을 추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비가 날아간 곳을 따라가 보았다. 나비는 1층을 거쳐 2층으로 날아갔다. 1층엔 응접실과 홀 그리고 귀빈식당 등이 있다. 이곳 귀빈식당은 임시정부가 귀국하여 공식 만찬을 개최했던 곳이고, 선생이 서거하셨을 때는 빈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나비가 날아간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응접실(서재)이 있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했던 방이 2칸 있다. 방 안쪽으로 선생의 침실과 거실이 있다. 거실 창가엔 선생이 쓰시던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선생은 이 책상에서 독서 하던 중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돌아가신 것이다.
일본 군인과 경찰이 60만(현재 200억) 원의 현상금을 걸고도 체포하지 못했던 선생을 우리 동포가 시해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경교장에서 나와 밖에서 경교장을 바라보았다. 선생의 거실 유리창에 두 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6월이 되면 경교장에 선생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2023. 수필문학.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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