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내 모습을 보이지 말라

여강 선생 2018. 4. 30. 19:45

                                           내 모습을 보이지 말라                                    

                                                                                            최중호                           
    누구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원하지 않는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도 사후(死後)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대구 팔공산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를 찾았다. 먼저 장군이 전사한 곳에 있는 표충단(表忠壇)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진 촬영하는데 갑자기 카메라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본래 기(氣)가 너무 센 곳이라 한다. 그래서 장군의 기를 받기 위해 전국에 있는 무당들이 몰래 찾아와 제(祭)를 지내기도 한단다. 기 때문이었을까? 입구에선 촬영이 잘되던 카메라가 이곳에서 고장이 난 것이다. 촬영할 물체를 보여주는 화면이 먹통이 되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전자회로 장치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더 이상 사진을 촬영하지 못했다.

  표충단은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장군이 전사한 자리에 만들어 놓은 사각으로 된 무덤이다. 장군이 전사할 때, 입었던 옷과 피 묻은 흙을 모아 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군은 무슨 일이 있었을까?
  927년 9월, 견훤의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시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해 정예군 5,000명을 이끌고 경주로 출발하였다. 왕건이 대구의 공산* 동수에 이르러 후백제군과 전투를 하던 중 이곳에 매복하고 있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장군은 왕건의 옷으로 갈아입고 왕건을 변복시킨 후,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하였다. 왕건의 모습으로 변장한 장군은 어가에 올라, 김락 장군 등과 함께 후백제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장군을 왕건으로 착각한 후백제군은 장군을 향해 총공격을 해 왔다.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후백제군은 장군의 목을 베어 갔다. 따라서 장군은 머리가 없는 시신으로 그곳에 남겨지게 되었다.
  표충단에서 나와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표충사(表忠祠)로 갔으나, 관리인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장군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5월 연휴에 춘천에 있는 장군의 묘소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강릉으로 가 경포대와 오죽헌 등을 둘러본 후, 저녁 무렵 춘천으로 갔다. 숙소를 정하기 위해 시내에 있는 여러 숙소를 다녀봤지만 방이 없었다. 외곽에 있는 남이섬까지 가 봐도 방이 없다. 다시 춘천으로 돌아와 찜질방에도 가봤지만, 하룻밤 머물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튿날 새벽에 대전으로 돌아왔다. 춘천에 가서도 장군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장군의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 평일을 택해 춘천으로 갔다. 장군의 묘소는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었다. 묘역으로 가는 길 입구에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을 지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장군의 묘는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묘역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소나무들이 좌‧우에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많은 병사가 장군의 묘역을 지키는 것 같았다. 묘역 왼쪽으로 난 경사 길을 따라 한동안 걸으면 장군의 묘가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묘의 봉분을 하나로 만드는데, 장군의 묘는 봉분이 셋이나 된다. 세 개의 봉분 중 가운데 봉분 앞에 상석과 비가 있다. 비에는 ‘高麗太師壯節公申崇謙之墓(고려태사장절공신숭겸지묘)’라 새겨져 있다.

공산 전투에서 장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왕건은 머리가 없는 장군의 시신을 보고 통곡하였다. 왕건은 차마 머리가 없는 장군의 시신을 그대로 묻을 수가 없었다. 없어진 머리를 황금으로 만들어 이곳에 묻어주었다. 이때 황금으로 만든 장군의 머리가 도굴되는 것을 염려해 봉분을 세 개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봉분에 장군의 황금 머리가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곳은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한다.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가 왕건이 사후에 들어갈 묫자리로 미리 잡아준 곳이다. 왕건은 생명의 은인에게 미련 없이 자신이 묻힐 명당자리를 내주었던 것이다.   
  묘 아래로 길고 넓게 펼쳐진 묘역은 여느 왕릉 못지않았다. 풍수를 모르는 문외한이 봐도 좋은 자리처럼 보였다.   
  묘역에서 내려와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장절사(壯節祠)로 갔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다. 관리인을 찾아봤지만, 외출 중이라 장군의 영정을 볼 수 없었다. 이번에도 장군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먼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대구에서 ‘수필의 날 행사’가 있었다. 행사가 끝난 후, 대구 근교에 있는 유적지를 탐방한다고 했다. 탐방 코스에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에 대구와 춘천에 갔을 때 보지 못했던 장군의 모습을 이번엔 틀림없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행사를 대구광역시와 대구문인협회에서 후원하기 때문이다. 대구에 갈 준비를 해놓고 행사 날짜만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군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구에 가기 3일 전, 복막염 수술을 해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이번 행사에 참석하는 춘천에 있는 ㅂ 회장과 서울에 있는 ㅊ 선생에게 장군의 영정을 촬영해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행사가 끝난 후 핸드폰으로 사진이 왔다. 기대를 하고 파일을 열어 봤으나, 장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표충단만 보였다. 이번 행사에서도 장군의 영정(影幀)은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다.
  며칠 후 춘천에 있는 ㅂ 회장으로부터 장군의 사진이 왔다. 춘천문화원에서 발행한 책자에 장군의 영정이 있어 촬영해 보낸 것이라 했다. 그렇게 보려고 해도 보여주지 않았던 장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장군은 우람한 체구에 갑옷을 입고 계셨다. 호랑이 가죽을 밟고 서서 왼손은 칼을 짚고, 오른손으론 갑옷의 허리띠를 잡고, 병사들 앞에서 호령하는 모습이다. 꽉 다문 입술에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는 후백제군을 단숨에 제압하고도 남을 기세였다. 그런 장군의 모습에서 대장부의 호탕한 기개와 목숨을 바쳐 주군을 지키려 했던 충성심을 엿볼 수 있었다.
  장군은 왜, 그런 용감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장군의 강한 자존심이 공산 전투에서 머리 없는 시신으로 남겨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지 말라.’ 하신 걸까?
  그렇게 보려고 해도 보여주지 않았던 장군의 모습을 이제서야 볼 수 있었다.
  그는 늠름하고 용맹스러운 장군의 모습 그대로였다.  

* 공산 : 팔공산의 옛 이름

                                                                             (한국수필. 2018.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