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호 수필

이종사촌 만들기

여강 선생 2024. 9. 13. 10:38

                                                               이종사촌 만들기  

                                                                                               최중호                                                           

  오래전 일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에 근무했던 ㅊ공고에 복직발령을 받았다. 대부분 선생님은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하지만 ㄱ선생님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최 선생 이거 참 미안해서 어떡하지요?”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ㄱ선생님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주었다. 
  지난번 중간고사 때 자기 반 학생 ㅇ군이 커닝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징계를 하기 위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ㅇ군이 나의 “이종사촌 동생”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선처를 해 주지 못하고 정학 처분을 해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사실 ㅇ군과 나는 인척 관계가 아니다. 단지 고향이 같다는 이유 말고는 그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왜, ㅇ군이 나를 이종사촌 형이라 했을까?’
  군에 입대하기 전이었다. 입학시험을 보러 온 중학생들에게 수험표를 나눠주기 위해 운동장에 집합시킨 적이 있다. 그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둘러보며 중학교 후배들이 몇 명 와 있기에, 시험이 끝난 후 음료수를 한 병씩 사 준 적이 있었다. 시험을 보기 위해 먼 곳에서 온 후배들이 반가워서 그랬다.
  그는 외지에 와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공부를 덜 한 까닭에 커닝을 해서라도 성적을 올리려고 하였다. 그의 잘못된 생각이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커닝을 하다 그만 감독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그는 교칙에 의해 처벌받을 것이 두려웠다. ‘그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나와 친척 관계가 된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면 학교 측에서 좀 봐줄 것 같아 그리 한 것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아무 관계도 없는 나를 끌어들여 이종사촌 형으로 만들었을까?’ 그의 심정을 이해할 만했다.
  그 후 그의 처지를 생각해 ㄱ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선생님들에게 “ㅇ군이 내 이종사촌 동생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리한다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학은 그만두고 퇴학까지 당할 판이었다. 그를 생각해 모든 비밀을 나 혼자 간직하기로 하였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래 팔자에도 없는 그를 이종사촌 동생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 후로 가끔 교내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면 그는 무슨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깝고 부담스러웠다.
  하루는 그를 불렀다. 그날도 그는 죄인의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내 눈치만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부른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를 위해 내가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이제부터 내가 너의 이종사촌 형이 되어 줄 테니, 그리 알고 매사 행동에 조심하라.”고 했다. 
  그 후, 선생님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ㅇ군이 나의 이종사촌 동생”이라 말한 후, “지난번 커닝 사건으로 여러 선생님께 심려를 끼쳐드려 미안하다.”는 말까지 했다. 
  이제 나도 그와 함께 커닝 사건의 공범이 된 것이다. 그 후로 선생님들은 그의 커닝 사건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항상 죄인처럼 행동을 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괴로웠던 학교생활을 마치고 그가 졸업하였다. 이제 학교에서 그를 만나는 일이 없어 마음이 편했다. 
  38년의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길에서 50대 후반이 된 그를 만났다. 그때도 그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시청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커닝 사건이 있은 지 38년이 지났다. 그때 같이 근무했던 ㄱ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도 이제 모두 정년퇴직을 하였다. 이제 솔직히 말을 해도 될 것 같다. “ㅇ군이 나의 이종사촌 동생이 아니었다.” 그때는 그가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라서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그도 이제 나이가 50이 넘었다. 다음부터 나를 만나게 되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지 말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사회에서 큰 죄를 지은 죄인도 38년의 세월이 흐르면 사면되었거나 석방이 되었을 것이다. 
  세월은 거짓이나 위선의 탈을 벗기고 진실을 이야기해 주는 능력도 갖고 있는가 보다.

                                                                                             (2015. 한국수필. 7월호)